
민간 오케스트라 ‘린덴바움뮤직’의 원형준 대표는 8년째 간절한 꿈 하나를 좇고 있다. ‘남북 청년 연합 오케스트라’를 결성해 평화 음악회를 여는 것이다. 하지만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몇 번이나 서울, 평양, 스위스, 독일 등지에서 남북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천안함 폭침사건 등으로 인해 남북 관계가 얼어붙으면서 번번이 좌절됐다. 광복 70년이었던 지난해엔 광복절에 맞춰 판문점에서 남북 음악회 ‘원 피플, 원 하모니’를 추진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남한과 북한 정부, 유엔군사령부의 승인도 받았다.
하지만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일어난 북한군의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도발로 인해 공연 시작 2시간 전에 무산됐다. 판문점 공연은 비록 무산되었지만 스위스인 플루티스트 필리프 윤트, 프랑스인 지휘자 앙투안 마르기에 등은 트럭 짐칸에 올라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휴전선 인근 석장리미술관(경기 연천군 백학면)에서 남쪽만의 음악회를 열어 아쉬움을 달랬다.
원형준 대표가 남북 오케스트라를 구상한 건 2009년이다. 국내외 젊은 음악가들이 함께 무대에 오르는 ‘린덴바움 뮤직 페스티벌’을 국내에 선보이면서 ‘남과 북이 한마음으로 연주하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했다. 유대인 출신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청년들로 구성한 오케스트라 ‘서동시집(West-Eastern Divan)’도 그에게 영감을 줬다. 한국전쟁 때 개성에서 헤어진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조부의 영향도 받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은 세계적 지휘자 샤를 뒤투아(Charles Dutoit)를 초빙해서 2010년 두 번째 페스티벌 때에는 뒤투아가 ‘남북 오케스트라’ 창립을 공식 제안하게 된다. 이듬해엔 유엔 북한대표부를 통해 북한 문화성과 접촉도 했다. 뒤투아를 비롯해 명문 오케스트라 악장수석 13명이 린덴바움 페스티벌 앙상블에 참여했다. 청년 음악도로 구성된 ‘린덴바움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도 창단하여 지금까지 연주자 189명이 린덴바움과 함께 연주했다. 일부 단원은 린덴바움을 거쳐 홍콩 신포니에타, 베르비에 페스티벌, 서울시향, 코리안심포니 등 전문 교향악단 단원으로 옮겨갔다.
2010년 유럽연합(EU) 등과 제휴해 유럽과 아시아의 청소년을 한국으로 초청해서 ‘유로 아시아 체임버 뮤직 페스티벌’을 개최한 이후, 2012년엔 주한 스위스 대사관과 함께 각국 주한 대사를 초청해 ‘린덴바움 스페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음악을 통해 국제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게 목적이었다. 2013년 2월 영국 옥스퍼드 유니온 초청으로 한반도 평화에 관한 연주와 연설을 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초청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음악회를 열었다. 비록 2012년과 2014년에 시도한 스위스와 독일에서의 남북 연합공연은 실패했지만, 중립국감독위원회 초청으로 판문점에서 남측만의 평화음악회를 여는 작은 성과를 거두었다. 2015년 8월 13일에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130여 명의 청년 음악가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에서 지휘자 정치용, 안투인 미구이에(유엔 오케스트라 음악감독)와 함께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과 <아리랑 환상곡>을 연주했다.
이번 <다큐&뮤직콘서트>에서도 ‘하나통일원정대’ 합창단과 베토벤 교향곡 9번을 프로그램에 넣는 것으로 준비 중이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은 인류애를 강조한 작품입니다. 베토벤이 청각 장애가 생겼을 때 작곡했어요. 4악장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하나가 됩니다. 독일 시인 실러가 가사를 썼는데, 분단된 것이 어떤 힘에 의해 서로 형제가 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대목 덕분인지는 모르겠으나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동·서독이 동시 입장할 때 베토벤 9번을 국가(國歌) 격으로 사용했어요. 동·서독은 통일 이전 올림픽에서 4차례 동시 입장했는데, 그때마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 국가 노릇을 했습니다. 남과 북이 하나 되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이 곡을 관객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린덴바움 연주 프로그램 1> 근대 낭만파 음악의 아버지, 얀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년 핀란드 헤멘린나에서 출생한 시벨리우스는 9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고, 15세 때부터는 바이올린과 작곡법을 배워 이 무렵부터 점차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음악가가 되려는 그의 희망을 반대했다. 1885년 헬싱키대학에 입학한 그는 가족의 바람대로 법률을 전공하면서 헬싱키음악원에서 베겔리우스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배웠다. 그 후 음악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당시 음악원 교수로 있던 명피아니스트 부조니에게 사사하였다. 본래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뜻을 품었으나 무대에서 긴장하는 성격 때문에 연주가를 단념했다는 이야기는 시벨리우스의 내성적인 성격을 잘 드러내는 에피소드다.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베를린(1889)과 빈(1890)에 유학하고, 빈에서는 브람스를 만나 가곡에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민족적인 소재를 통속적인 묘사에 빠지지 않고 유럽풍인 지적 묘사로 처리한 그의 작풍은 유학 시절에 쌓은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892년 모교 헬싱키음악원의 작곡과 바이올린교수가 되고, 국민적 대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에 의한 교향시 <크레르보>, <엔사가>, 모음곡 <칼레발라> 등으로 국외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투오넬라의 백조>를 비롯한 <4개의 전설>, 교향시 <핀란디아>, <제1교향곡> 등으로 명성을 얻고 1897년에는 국가에서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하여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아감에 따라 국외로의 연주여행도 많아졌으나, <제2교향곡>을 완성한 1902년 전후부터 4년간은 귓병으로 고생을 하고 1904년에는 헬싱키 교외의 별장으로 옮겨 여기에서 죽을 때까지 반 은둔생활을 했다.
1924년 <제7교향곡>, 이듬해의 교향시 <타피오라> 이후는 거의 작품이 없고, 뇌출혈로 91세의 생애를 마쳤다. 7개의 교향곡 외에도 많은 교향시와 바이올린협주곡 등이 있고, <핀란디아>와 <투오넬라의 백조> 등이 특히 사랑받고 있다.
<린덴바움 연주 프로그램 2> 유럽의 자연을 상상하며 듣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애국적 교향시 <핀란디아>로 잘 알려진 시벨리우스의 주요 업적은 7개의 교향곡과 5개의 교향시로 집약된다. ‘근대 낭만파음악의 아버지’란 칭호를 듣는 그이지만 개인적 감성을 아기자기하게 묘사한 소품과는 거리가 멀다. 협주곡도 알려진 것은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 한 곡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20세기의 훌륭한 바이올린 협주곡들인 바르토크, 스트라빈스키 등의 작품보다 훨씬 인기가 있다.
시벨리우스는 고국인 핀란드의 춤곡이나 민속 선율을 작품에 쓰지 않았다.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그의 교향곡 2번 시작 부분 선율은 북유럽의 마을 사람들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민요를 떠올리게 하며, 바이올린 협주곡 3악장의 활달한 춤도 이 나라 사람들이 출 법한 춤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벨리우스는 ‘이 선율들은 단지 내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고, 음악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도 이와 같다. ‘만들어낸’ 선율과 춤곡인데도 민속적으로 들리는 것 또한 시벨리우스의 탁월한 재능 중 일부였다.
대신 시벨리우스 곡의 영감의 원천은 핀란드 문학이었다.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은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를 접하면서부터다. <포횰라의 딸(Pohjola’s Daughter)>, <루온노타르(Luonnotar)> 등을 포함한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음악적 영감이 문학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경관과 내밀한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시벨리우스를 대뜸 ‘자연시의 시인’쯤으로 기억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교향시와 7곡의 교향곡에서 성취한 업적은 주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섭렵에 기인한 것이다. 3번 교향곡의 1악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1악장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총체성과 음구조의 구축은 오히려 그 모델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의 비밀은 이러한 유기적 구조물의 구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8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열리는 <다큐&뮤직콘서트>에서는 북유럽의 자연을 상상할 수 있는 시벨리우스의 교향곡을 린덴바움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관객에게 선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