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현장기록]다큐멘터리와 미장센
- 일시 : 9.27.(수)
- 장소 : 메가박스 백석 컴포트 6관
- 강연자 : 조명진 (전문위원), 마르탱 거트 (파리3대학 다큐멘터리 이론전공 교수)
- 정리 : 김신 (시민에디터)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는 도구이고 다큐멘터리가 진실을 현상하는 장르라는 통념은 여전히 지배적인 것 같다. 항상 ‘악마의 편집’이라는 관용어를 습관처럼 내뱉는 우리의 무의식에도 여전히 그런 통념이 스며들어 있는 듯 하다. 하지만 하루에만 30억장이 넘는 사진이 전세계에서 업로드되는 상황속에서 우리는 어쩌면, 이미 충분히 많은 사실과 이미지를 대면하며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진실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다. 실시간으로 보도되는 자료와 이미지의 포화속에서 신경을 곤두세우려 하지만 어딘가로 족적을 감춘 진실의 행방은 사실성이 제거된 셀카처럼 묘연하고 불확정적이기 짝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속에서 다큐멘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와 미장센’이라는 주제로 기획된 제9회 DMZ국제다큐영화제의 한 섹션에는 조명진 프랑스국립예술사 연구원 프로그래머와 마르탱 거트 파리 3대학 다큐멘터리 이론 전공 교수가 참석했다. 다큐멘터리의 시초격이라 주목받는 작품에서부터 영화사의 유수의 다큐멘터리들이 연출적 조작이 가미된 결과물이었다는 이들의 설명앞에서 다큐가 사실을 담아내는 기록영화라는 관변적인 시각은 전면으로 공박된다. 사실속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그 이전에 사실을 전하는 다큐멘터리란 가능할까.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는 어쩌면 이 곳에서 새겨들을 전언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명진 전문위원 안녕하세요, 이번에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와 미장센’이라는 주제로 이 섹션을 기획한 조명진이라고 합니다. 이 섹션에 포함된 영화들을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로버트 플래허티 감독의 <아란의 사람들>(Man of Aran, 1934), 그리고 에드가 모랭과 장 루슈 감독의 <어느 여름의 연대기>(Chronicle of a summer, 1961), 그리고 로버트 크레이머 감독의 <미 1번 국도>(Route 1 USA, 1989), 피터 왓킨슨 감독의 <퍼니시먼트 파크>(Punishment Park, 1971)와 같은 클래식한 영화들, 그리고 최근에 만들어진 <튀니지의 샬라>(Challat of Tunis, 2013), <이란 사람>(Iranian 2014)까지 여섯 편을 다큐멘터리와 미장센이라는 주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 옆에는 파리3대학에서 다큐멘터리 이론 전공 교수로 재임중이신 마르탱 거트 교수님이 계십니다. 우선 첫 번째로 제가 발제를 하고, 두 번째 파트에서 마르탱 교수님이 발제를 하실 계획입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왜 이런 섹션을 기획했는지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또 다큐멘터리 영화사에서 미장센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마르탱 교수님은 다큐멘터리의 미장센 중에서 특별히 “말의 미장센”이라는 부분에 초점을 맞춰 발제를 하시겠습니다. 우선 시작하기 위해서 미장센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를 하고 시작해야할 것 같아요.
제가 기획에 앞서 지인분들과 얘기를 하다보니, 한국에서 통용되는 미장센이라는 개념이 좀 좁은 영역에서 논의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미장센이라는 개념이 화면구성이라는 좁은 의미에서만 정의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미장센이라는 원래 불어의 어원을 살펴보자면 “무대위에 놓다”, 혹은 “무대위에 설치하다”라는 의미인데, 일반적으로 이는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무대에서의 조명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대사, 그리고 씬들의 구성까지 포함한 전반적인 연출자체를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불어권에서는 미장센이 그런 개념으로 일러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이 섹션의 기획 의뢰를 받았을 때, 다큐멘터리가 처음 발명되었을 시기부터 감독과 관객들이 여전히 질문하고 있는 “다큐멘터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틀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주제를 고르고 싶었습니다. 일단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우리는 일반적으로 논픽션이라는 개념과 곧잘 등치시키곤 하는데요, 여기에는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대척점에 놓으려는 시각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록영화’라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일반적인 관점 또한 다큐멘터리가 순수한 기록을 남기는 장르의 영화라는 시각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기획을 하면서 DMZ Scope에 1부, 2부를 나눠 작성을 했었던 발제문에도 써져있지만, 거기에서 제가 인용을 했던 고다르의 한 경구가 있습니다. : “모든 훌륭한 픽션은 결국 다큐멘터리의 경향성에 이르고, 모든 훌륭한 다큐멘터리는 픽션의 경향에 이르므로, 둘은 최종적으로 만나게 된다.” 라는 구절을 남겼는데, 고다르는 이 개념을 좀 더 발전시키기 위해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들을 예시합니다. 트뤼포가 파리에서 50년대에 촬영한 영화들은 결국 지금은 볼 수 없는 당대의 환경에 대한 아주 훌륭한 다큐멘터리가 아닌가? 라고 주장을 하는건데요. 실제로 60년대가 지나가면서 당시의 파리 거리의 건물들이 정권에 의해서 변모를 겪게됩니다. 그러므로 트뤼포의 영화에서 우리는 당대의 영화가 아니면 확인할 수 없는 파리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는 거죠. 고다르는 이런 관점에 의해서 픽션이 곧 하나의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특정한 배우의 모습과 같은 영화 내적인 요소들도 하나의 도큐먼트의 형태로 남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의 픽션이란 한 감독이 작품을 완성해가는 과정으로서의 다큐멘터리이기도 한거죠. 그러므로 픽션이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죠.
또 우리는 다큐멘터리를 항상 ‘기록영화’라는 개념과 연결시키곤 합니다. 물론 관찰자의 시각에서 작품을 객관적으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욕구들과 경향은 실재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객관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고 질문을 던져본다면 우리는 그 객관성이라는 개념이 애초에 가능한가에 대한 회의를 가져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큐멘터리 또한 촬영자가 지니고 있는 문제의식과 시각에 의해서 근본적으로 사실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다큐멘터리는 이미 관객에게 전달되는 과정속에서 적합하다고 판단된 연출자의 해석이 필연적으로 가미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기록영화라는 객관적인 수사적 표현 또한 결국에는 환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의 경험속에서 이것이 인지하고 있습니다. 촬영을 하는 순간 우리의 주관이 개입된다는 사실은 작은 앵글의 차이를 통해서 모습이 달라지는 셀카와 인물 사진의 경우에도 실감할 수 있죠.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또한 기계에 의해서 촬영되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픽션과는 다르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환상인 셈이죠.
물론 픽션과 다큐멘터리와의 차이는 실재하고 서로가 가지는 가치와 차이점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한 소설을 쓴 소설가와,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의 차이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똑같은 역사적 사실을 재현했다고 하더라도 기록의 의도가 다르기 때문에 저는 그 “의도의 차이”가 픽션과 다큐의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장르의 감독들은 자신들이 연출하는 작품들을 관객들이 보고 어떻게 생각할 지를 다르게 전제하고, 그것에 기반해서 각자 다르게 구성을 하기도 하는 것이죠. 픽션과 같은 경우는 영화의 스타일이 감독의 스타일이기도 한 반면, 다큐멘터리 영화의 스타일의 경우는 그것이 현실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담아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기도 할 뿐만 아니라 감독이 관객을 대하는 태도를 미장센을 통해서 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큐에서의 미장센은 감독의 윤리의식이 픽션에서보다 더 강력하게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죠.
제가 사실 좋아하는 다큐멘터리 영화같은 경우에는, 관객에게 사고를 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 해석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다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제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좋은 영화들이 이런 경우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주제를 선택하느냐 보다는 어떻게 소재를 보여주는가가 중요하기도 한 것이죠. 다큐멘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제와 함께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윤리와 방식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왜 다큐멘터리와 미장센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느냐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제가 우선 한 영화의 클립을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많이들 보셨을텐데요, 태초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던 뤼미에르 형제의 다큐멘터리 <리옹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Sortie des Usines Lumière à Lyon, 1895)>입니다. 이 영화의 경우는 버전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버전은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이 발명한 기계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촬영한 클립,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그 이후에 뤼미에르 형제가 자신들의 공장의 인부들을 소집해 모종의 연출을 더해 촬영한 클립입니다.
주목할만한 사항이 있습니다. 영상을 자세히 보시면 노동자들이 입고있는 복장이 일반적으로 그들이 일할 때 입는 복장이 아닙니다. 불어에서는 일요일의 의상이라고 불리는, 교회를 갈 때 입는 멋드러진 복장들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또 노동자들은 가운데에 있는 뤼미에르 형제의 카메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좌우로 갈라져 움직이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예상치 못한 요소가 발생합니다. 개 한 마리가 공장에서 튀어나와 노동자들의 대열을 흐트리는 겁니다. 물론 여기에서 개는 뤼미에르 형제의 연출에 기반한 것이 아닌 우연적인 요소입니다. 또 어린아이가 화면 앞으로 우연히 등장하는 장면도 있고요. 이런 부분들을 유심히 보시면서 영상을 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영상 상영)
보신 바와 같이, 카메라라는 기계의 성능을 시험하기 위해 단순히 기록을 한 최초의 다큐멘터리조차도 최소한의 미장센, 즉 연출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점점 다큐멘터리가 많이 제작되면서 이런 경향은 심화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까 말씀드린 로버트 플래허티의 <아란의 사람들>도 그런 예입니다. 동일한 감독의 <북극의 나누크>(Nanook of the North, 1922)를 통해 플래허티는 다큐멘터리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데요, 두 작품에는 모두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장면이 공통적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플래허티가 원주민들을 만났을 때, 이미 작품속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사냥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미 사라진 전통의 방식을 영화속에서 재현한 것이죠. 플래허티는 서양의 문명이 개입되기 이전의 원주민들의 선조의 생활 양식을 보여주기 원했지만, 그런 전통이 이미 사라져 버렸기에, 그들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후손들을 통해서 가상의 장면을 재현한 것입니다. <아란의 사람들>과 같은 경우는 <북극의 난누크>보다 더 나아갑니다. 여기에서는 한 가족을 촬영하는데 실제로 이들은 가족이 아니고 당시에 아란 섬에서 살고있던 주민들중 연출에 적합하다고 생각된 이들을 캐스팅한 겁니다. 플래허티에게는 촬영할 당시에 살고있던 이들이 영위하고 있던 생활습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척박한 환경속에서 사라져버린 그들의 전통을 보여주기를 원한 것입니다. 또 촬영의 편의를 위해서 연출을 감행한 것도 있는데 영화속 원주민들이 제작하는 이글루는 촬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실제보다 훨씬 큰 사이즈로 제작이 되었다고 하죠. 이런 점들은 연출자들의 의도나 필요에 의해서 각각의 다큐멘터리들이 다른 미장센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예증합니다. 이후에 플래허티가 유성영화의 시기까지 작업을 하면서 인터뷰등, 다큐영화의 전형이라 말할 수 있을 법한 형식들을 담아내는 점도 확인할 수 있죠.
처음에 강연을 하면서, 시네마 베리테라는 정의를 만들어낸 작품을 보여줄 것인가, 아니면 다이렉트 시네마로 널리 알려진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영화를 보여줄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요, 미장센을 좀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어느 여름의 연대기>를 선정하게 되었습니다. 다큐멘터리가 50~60년대 초에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양식을 발명하면서 한편으로는 다큐의 스타일에 대한 그들 나름의 생각을 조형해낸 면도 없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흔히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형식에 대해 익히 들어온 “계획없이 사건 현장을 찾아가 투명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라는 식의 서술에 대해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겁니다. 촬영 기간동안 될 수 있는대로 개입을 최소화하고자 하는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을 예시로 생각해본다고 하면, 이 분은 사실 편집을 통해서 영화를 재구성하는데 가장 많은 공을 들이셨습니다. 그는 공공기관을 촬영한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는데 그 기관 자체를 촬영한다기 보다는 거기에 속한 사람들이 어떻게 작업을 수행하는가를 보여주는데 더 방점을 찍은 듯 합니다. 그러니까 다이렉트 시네마의 전범적인 예라고 알려진 와이즈먼 감독을 통해서도 우리는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장르에 대한 오해를 풀어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조금 후에 이 부분에 관해서는 마르탱 거트 교수님께서 자세하게 부연을 하실 듯도 합니다.
다른 논점을 피터 왓킨스 감독의 <퍼니시먼트 파크>를 통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는 흔히 많은 분들이 익숙하실지도 모르는 모큐멘터리,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를 통해 지칭되고 있습니다. 이 뜻은 다큐에서 사용하는 미장센을 사용해서 픽션을 다큐인 것처럼 보이게하는 형식이기도 한데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어느 순간에 다큐는 이런 것이다. 라는 생각이 관객에게 어느 정도 심어져왔다는 사실을 방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현장감때문에 카메라가 흔들린다던가,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르포르타주식의 즉자적인 상황 연출과 같은 기법이 처음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필요를 위해서 동원되었다면, 이제는 그런 테크닉이 다큐라는 관념을 고정하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는 것이죠. 물론 이런 이야기로만 작품의 이야기를 한정하려는 것은 아니고 감독님은 극중에서 보여주는 세계가 단순히 픽션에 한정되어있지 않고 우리의 세계에 밀접해있기도 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효과적인 방안을 채택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또 <튀니지의 샬라>라는 작품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이 작품을 제작하신 감독님께서는 처음에는 탐사 다큐의 형식으로 작품을 만들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2003년쯤에 튀니지의 동네에 어떤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면서 몸이 드러나는 옷을 입은 여자들의 육체를 난자하는 사건이 여러 번 벌어졌고, 그 사건을 전해들은 감독님께서 “이 사건은 뭘까”라는 문제의식을 지니고 다큐를 만드려고 착상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샬라는 칼로 난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중간에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형식을 혼재시키는 방식으로 제작을 선회했다고 하십니다. 사전조사를 하면서 감독님은 단순히 한 사람의 범인에 주목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튀니지에서 “여성은 남성에 보조적인 존재.”라는 식의 헌법 조항이 발의되었던 것(물론 항의를 받아 최종적으로 승인되지는 않았습니다.)과 같은 행간에서 볼 수 있는 남성중심적인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려고 하셨답니다. 그래서 단순히 개별적인 희생자와 가해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혼합해 여러 명의 샬라가 영화속에서 출몰하는 연출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다큐가 어떤 특별한 개별 사건과 인물을 경유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라면 픽션이라면 좀 더 넓은 공동의 사람들을 가로지르는 의제를 보여줄 수 있을텐데, 이 형식들이 혼재하는 작품이라고 생각되어 선정을 했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는데 저는 여기에서 말을 줄이도록 하고, 마르탱 거트 교수님께서 앞서 말한 것처럼 “말의 미장센”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말을 드릴 예정입니다.

마르탱 거트 안녕하세요, 소개를 받은 마르탱 거트라고 합니다. 먼저 이렇게 참여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말씀드릴 파트는 언어와 관련된 부분인데, 그 중에서도 증언에 관한 부분에 대해 말할 계획입니다. 언어의 문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를 볼 때 목소리로 전달되는 담화에 관심이 쏠리시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1부에서도 이야기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흔히 전달되는 정보가 객관적이라는 다소간의 환상을 품고있는데요, 실제로는 다큐멘터리속 담화들도 연출된 부분이 꽤 많습니다. 마치 지금 제가 꺼내놓고 있는 말이 연출된 대사인 것처럼 말이죠. 다큐멘터리속 대사들은 특정한 상황, 시간대에서 발설되고 촬영되는 대사들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의 연출이 가미될 수 밖에 없죠. 여기에는 하나의 연출뿐 아니라 여러 연출이 나타나는데요, 한 인물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이 나오고, 이들이 대화를 벌이는 상황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증언이라는 것이 다른 언어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증언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가장 객관성을 담보하는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법적인 증거처럼 인식되곤 하고, 사회학자들도 증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여러 번 발화되었을 때에 내용이 동일한 경우에만 그것이 유의미하다고 판단을 합니다. 몇 가지 예들을 다음부터 보여드릴텐데요, 감독이 카메라 뒤에서 단순하게 인터뷰하는 장면이 있는가하면, 좀 더 그런 연출을 픽션화한 사례들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첫 번째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과 장 루슈인 <어느 여름의 연대기>라는 작품인데, 혹시 영화제에서 미리 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앞부분에서 이야기를 들으셨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형식적 변용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카메라라는 기계가 점점 가벼워지고, 촬영을 하는 방식이 자유로워지는 면모에 대해서는 강조를 하고 싶습니다. 이 점으로 인해 촬영에 있어서 많은 자유가 생겼습니다. 특히 정치적인 소재를 촬영할 때 기존에 우리는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들리는 말만 수용했었는데, 이제는 누구나 가벼운 도구를 통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말할 자유를 얻었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느 여름의 연대기>는 1960년대 파리의 청년들을 보여주는 다큐입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감독은 “시네마 베리테라는 경험에 대한 실험이다.”라는 말을 특기하고 시작합니다. 실험이라는 말에 주의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처음에 강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를 단순히 현실을 관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바로 이 영화속에서도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처음에 보실 장면은 영화를 만든 두 감독이 젊은 여자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이 여자는 추후에 영화에 아주 깊게 참여하는 참여자가 됩니다. 감독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의 배후에 있는게 아니라 앞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런 연출을 통해 우리는 영화를 제작하는 이와 찍히는 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실제로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서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는 것처럼 연출이 되고 있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거짓말이나 속임수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아주 자연스럽다고 추측되는 장면이 실은 연출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종류의 자연스러움도 또한 이 감독들이 기획하고 보여주고자 했던 실험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발췌를 할 때 일반적으로 많이 보이는 장면이라 그렇게 특별한 선택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꽤나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감독들, 파리의 아프리카 학생들과 여자들이 대화를 하는 장면인데, 아프리카의 정치적 상황과 인종차별과 같은 주제에 대해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주인공인 막슬린이라는 영화가 혼자 파리의 거리로 나와 독백을 시작합니다. 독백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다양한 연출속에서 보이는지에 대해 말하기 위해 이 장면을 선택했습니다.
(영상 상영)
일반적으로 독백은 연극이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연출은 있지만,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혼잣말을 하는 장면은 사실 드뭅니다. 게다가 이 독백 장면은 감독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혼자 내면으로 이야기하는 소리에 가깝습니다. 이 독백을 통해서 감독은 내면성을 강조하고자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클로즈업보다 광장에서 고립되어 있는 듯이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롱숏으로 담아낸 장면에서 이런 연출들이 더 부각되고 있습니다. 촬영 당시에는 옷 안에 작은 마이크를 넣었다고 하네요. 이 장면에서 보신 것처럼 연극의 무대연출처럼 보이는 이 장소는 실제 아직까지 현전하는 파리의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 때 여자가 말하는 대사는 당시의 파리의 상황과는 거의 무관한 사적인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두 가지 장소가 나오는데, 첫 째 콩코드 광장에서 여자가 독백을 시작할 때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현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지점이 있지만, 두 번째로 이동한 레알 광장에서는 점점 더 과거의 이야기 위주로 말을 하면서 현재와 멀어지곤 하는데, 그렇기에 이는 시적인 메아리라고 표현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연출에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는데, 막슬린이라는 주인공은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다는 점입니다. 이런 말들은 객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증언이라기보다는 나치 수용소 기간동안 죽은 이들과 아버지에게 바치는 사적인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연출된 장면들을 보고 많은 이들이 이는 진실과 반대된다. 픽션과 가깝다고 힐난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자신과 관련된 죽음과 전쟁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러한 주인공의 대사는 오직 이러한 연출을 통해서만 담아내는 것이 가능했을 거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에서도 언어가 연출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현재는 살아있지 않는 사람들의 부재와 죽음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에 관한 주제인데요.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현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낼 것인가에 대해 살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또 증언이라는 것이 여기에서 흥미로운 이유가 있습니다. 증언 자체의 중요성, 다큐멘터리 내부에서 증언의 중요성의 측면에서 그것은 사라져버린 이들에 대한 증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증언을 통해 이미 지나가버린 사건들을 현재의 우리에게 재현하는 역할을 맡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영화의 존재론과 결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화는 이미 촬영된 순간 지나가버리고 사라져버린 순간을 현실로 재현하는 것이기에 앞서 말한 증언의 측면은 영화의 존재론과도 연관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출은 여기에서 지나가버린 과거와 현실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겁니다. 부재를 연출하는 두 가지 방법도 있을텐데, 먼저 사라진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누군가를 통해 연출하는 방법일텐데, 클로드 란쯔만의 <쇼아>(Shoah, 1985)를 예로 들어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을 당한 이들의 일기가 살아남은 수감자를 통해 읽히는 연출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용소의 상황의 경험자를 통해 사라진 이들의 상황이 발설되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는 전문적인 배우를 통해 연출하는 장면일텐데, 엘리 위젤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관해 제작한 3부작의 다큐멘터리에서 실제 증언을 바탕으로 각 배우가 화면에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라진 이들의 목소리를 증언하는 연출이 나옵니다. 배우가 보이지 않으므로 마치 유령이 말하는 듯한 효과가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클립을 보여드리고자 하는데요, 미국의 한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지오반니 프란체스코 감독의 <스톰 리버>라는 작품의 일부입니다.
(영상 상영)
이 장면에서는 꽤 클래식한 연출 방법이 사용되고 있는데요, 1930년대 미국의 채석광에 살았던 이들의 증언에 관한 다큐인데 화면에서 당시의 환경이 제시되고 있는데, 목소리는 현재 그 곳에 살고있는 이의 목소리가 기입되고 있습니다. 이 연출 방식에서는 화면에서 여러분들이 듣고 보는 이의 목소리와 목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은 제시되지 않는 것 사이의 분리를 체험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사건을 경험하지 않은 이의 목소리와, 눈에 보이지만 목소리가 없는 이들 사이의 분리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채굴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이민자들이었는데, 화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들 또한 같은 장소에서 현재 살아가면서 유사한 경험을 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다보니 같은 장소에서 유사한 경험을 했던 이들의 열악한 환경을 두 시대의 간극을 건너뛰어 보여주는 연출을 통해 에코와 같은 작용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나름의 특수성과 보편성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겠습니다. 당시의 삶의 모습과 현재의 삶의 모습을 비교하고 대조해볼 수도 있겠고요. 또 여자가 갑자기 카메라를 향해 돌아서서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마치 다큐멘터리속 주인공이 관객에게 직접 호소를 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빚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연출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기도 하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