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숨 쉬는 영화 : <피플 파워 폭탄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_존 토레스 x 유운성

2017.10.12

스스로 숨 쉬는 영화 :
존 토레스의 <피플 파워 폭탄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_존 토레스 x 유운성

  • 일시 : 9.24.(일)
  • 장소 : 메가박스 백석 8관
  • 강연자 : 존 토레스 (감독), 유운성 (평론가)
  • 정리 : 한동혁 (시민에디터)

존 토레스(John Torres)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피플 파워 폭탄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2016, People Power Bombshell: The Diary of Vietnam Rose)는 하나의 만남으로 시작됐다. 어느 날 존 토레스는 ‘리즈 알린도간’이라는 배우에게 연락을 받았다. 그녀는 존 토레스도 원래 알고 있었던 저명한 배우였다. 리즈 알린도간은 존 토레스에게 제안을 했다. 30년 전, 자신이 주연이자 제작을 맡아 촬영했던 미완성의 영화를 지금이라도 당신이 완성시켜 줄 수 없겠냐고. 영화의 제목은 <베트남 로즈의 일기>(1986). 20세기 필리핀의 저명한 감독이었던 셀소 Ad. 카스틸요 감독의 작품이었다.

1986년 당시, 필리핀에선 ‘피플 파워 혁명’이 일어났다. 페르난디드 마르코스의 독재정권에 분노한 필리핀 시민들은 거리로 나와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거대한 역사의 사건 앞에서 <베트남 로즈의 일기> 촬영은 뒤로 밀려 날 수밖에 없었다. 리즈 알린도간과 함께 공동으로 영화를 책임지던 제작자가 현장을 떠나 시위에 합류하는 일도 일어났다. 결국 영화는 70%만 촬영 된 채 제작이 무기한 중단되었다.

리즈 알린도간에게 있어 <베트남 로즈의 일기>는 자신이 처음으로 제작과 주연을 함께 맡은 작품이었다. 연기자로서 살아오며 얻은 수익의 대부분을 투자 했을 정도로 큰 애정을 가졌던 영화이기도 했다. 그녀는 촬영이 이루어진 분량의 네거티브 필름을 30년간 직접 보관했다. 언젠가는 꼭 영화를 완성시키고 싶다는 소망도 함께 가졌다. 존 토레스가 리즈 알린도간과 처음 만난 날, 그는 그녀의 노트북을 통해 디지털로 변환된 <베트남 로즈의 일기>의 푸티지들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많이 손상되어버린 클립들은 원래의 색을 잃은 상태였다. 게다가 사운드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무런 편집이 되어 있지 않은 소스들을 보며 존 토레스는 문득 생각했다. 이미지만 존재하고, 사운드는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있지 않다는 속성이, 새롭게 시작할 자신의 영화의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라고.

존 토레스는 전작 <후렴은 노래속의 혁명처럼 일어난다>(2010, Refrains Happen Like Revolutions In A Song)에서 이미 한번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하는 실험을 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는 마을에서 영화를 촬영 한 뒤, 언어를 정식으로 번역하지 않은 채 상상으로 마을 사람들의 대화에 자막을 입혔다. 실제로 그 언어를 아는 이가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다면, 들리는 사운드와 보이는 텍스트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그런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순간 인물들의 입에서 말해지는 소리들의 성질은 대사 보다는 음악에 가까워진다.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럼에도 분명한 서사를 가진 채 진행되었다. 논픽션이면서 동시에 픽션이기도 한 새로운 영화가 완성 된 것이다.

존 토레스는 <베트남 로즈의 일기>의 푸티지를 이용해 또 한 번 이미지와 사운드를 분리시키는 실험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동시성을 없애보기로 했다. 그는 우선 30년 전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을 한 방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스크린에 <베트남 로즈의 일기>원본 소스를 영사 한 뒤, 이것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배우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현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영화 제작 전반에 관한 이야기,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야기, 현장에서의 불쾌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 배우들은 종종 자신들의 모습(이미지)은 없고 음성(사운드)만이 새롭게 완성 될 영화에 담긴다는 사실에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럴 때 마다 존 토레스는 ‘이 영화는 당신들을 30년 전의 그곳, 촬영장으로 데려가 현재의 당신들이 그때의 당신들을 만나보는’ 영화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결국 배우들은 존 토레스의 믿어 주었고, 그의 의도에 따라 주었다.

영화가 점점 완성되어 가면서, 존 토레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음성으로만 출연하는 배우들이 갈수록 연기를 하듯이 대사를 말 한다는 것이다. 음정에서, 리듬에서, 대사에 사용하는 단어의 선택에서 존 토레스는 마치 이들이 30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금 영화 속 인물들을 연기하고 있다고 느꼈다. 배우로서 30년 전의 자신을 바라보는 지금의 음성과, 인물로서 30년 전 멈춰버린 영화의 수명을 지속시키는 대사가 영화를 넘나들었다. 말하자면, <베트남 로즈의 일기> 라는 영화의 픽션과 <피플 파워 폭탄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의 논픽션이 한 영화 안에서 동시에 존재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 한 것이다. 모든 대사가 녹음 된 뒤, 존 토레스는 새롭게 녹음된 사운드에 맞춰 새로운 장면들을 조금 더 촬영했다. 그리고 새롭게 찍힌 장면들을 일부러 훼손하여 <베트남 로즈의 일기>의 오래된 소스들의 질감과 비슷해지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관객들은 어떤 장면이 새롭게 찍힌 장면이고 어떤 장면이 과거에 찍힌 장면인지 쉽게 구분 할 수 없다.

시간을 구분 할 수 없는 빛바랜 이미지들, 그 위로 싱크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들려져 오는 다양한 이야기들. 영화는 관객들의 이해 혹은 동의와 상관없이 그저 스스로 스크린 위에서 존재 할 뿐이다. <피플 파워 폭탄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가 갖고 있는 1986년이 갖고 있는 30년 전의 이미지. 2016년이 갖고 있는 30년 후의 사운드. 그 간극을 채우는 배우들의 기억과 환상과 꿈. 그것이 시간에 의해서건, 의도에 의해서건 결국 손상을 입은 필름의 일렁거림은 영화가 갖고 있는 시간성, 동시성, 필름과 디지털, 픽션과 디지털이라는 다양한 경계들을 흐릿하게 만든다.

21세기, 영화가 이젠 막다른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닐까 자문하는 시대에, 그래도 우리에겐 스스로 확장하기 위해 애를 쓰는 작가들과 영화들이 남아 있다. 그런 의미에서 존 토레스의 영화는 영화가 극장 안에서 숨을 내쉬며 자신의 꺼져가는 생명을 아직도 스스로 지켜내려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영화를 사람이라면, 그것이 분명 더 없이 감동적으로 다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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