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조명이 꺼지고 난 뒤, 아무도 퇴장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주인공들, 그 뒤의 삶
도상희 시민에디터
궁금했다. 여전히 당신은 길 위에서 울곤 하는지. 밥은 제때 챙겨먹는지. 눈이 보이지 않는 당신의 아이는 잘 크고 있는지. 사람들은 세상이 좋아진다고 하는데. 국민 열에 여덟이 대통령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그래서 당신은 잘 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Still and All, 2015)의 조선소 용접공 권민기, 동자동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 <사람이 산다>(Slice Room, 2015)의 오승희, <서른 넷, 길 위에서>(Thirty-four, on the road, 2015)의 장애인 활동가 문정애, 밀양 송전탑 투쟁을 담은 <즐거운 나의 집 101>(Home Sweet Home, 2015)의 남어진까지. 지난 DMZ국제다큐영화제 상영작 속 네 인물을 만났다. 이들은 외려 세상의 안부를 물었다. 나를 촬영했던 다큐멘터리는 끝났지만, 여전히 세상의 아픔은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고. 그래서 괜찮지 못하다고.
빛 뒤의 그림자, 비정규직을 알아주었으면

권민기씨(51)는 조선소 용접공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알게 된 김영조 감독이 부산 영도다리 밑 사람들의 이야기를 찍고 싶다고 부탁해왔을 때 흔쾌히 응했다. 덕분에 민기씨는 자신의 조선소 용접공 생활의 마지막 순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 담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됐다. 그가 열아홉이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장이 됐다. 당장에 교복과 책가방을 영도다리 밑으로 집어던졌다. 납땜인두를 손에 쥐었다. 이후로 30여년을 해왔던 용접일을 그만 둔 이유에 대해서 그는 “비참한 비정규직 생활에 지쳤다.”고 했다. 국내 조선소 용접공의 90%는 비정규직이다. 이들은 정규직보다 적은 급여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 평생을 산다. 그는 “우리(용접공들)끼리 이런 농담을 해요, ‘출근은 대우조선으로 하고 퇴근은 현대조선에서 한다’.”며 웃었다.
민기씨는 다큐촬영 이후로는 구청 소속 정규직 청소노동자로 3년째 일해오고 있다. 청소노동자 공채 면접 당시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인생에서 단 한번만이라도 정규직으로 일해보고 싶습니다.”하고 답했다는 그는 늘어난 여가시간 덕에 영화 속에 등장했던 색소폰을 여전히 연주한다. 스킨스쿠버와 도자기 빚기라는 새로운 취미도 생겼다. 그는 지금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만 비오는 날이 아니고는 매일 용접 일을 하고 있는 친구, 동생들이 마음에 걸린다. “최근 조선소의 위기로 수출 세계1위 자리를 내주기도 했지만 지난 빛 뒤의 그림자인 조선소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고를 알아주었으면, 이들에게도 ‘여유’가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유리 엄마’이전에 ‘오승희’에요

오승희(31)씨는 쪽방촌에 살았다. 불쑥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동자동 쪽방촌에 방 한칸을 얻어 살아버린 송윤혁 감독과, 승희씨의 배우자 일수씨가 먼저 친구가 됐다. 일수씨네 쪽방에서 동거를 시작한 부부는 그렇게 <사람이 산다>(제8회 DMZ국제다큐영화제) 속에 자연스레 담겼다. 3년 남짓의 촬영 중 아이 ‘유리’가 그들을 찾아왔고 임대주택에도 당첨됐다.
임대주택의 시설은 좋지만 쪽방촌 이웃들의 살가움이 더 그립다는 승희씨는 현재 장애인 여성 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다리가 불편한 승희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장애인들을 위한 활동보조를 어떤 친구는 받고, 자신은 받지 못했던 경험 이후로 장애인 정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관심은 곧 사회의 여러 문제로 향했다. 요즘 승희씨는 광화문 차도 장애인 농성장 지킴이로 활동하거나, 2030 장애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주제로 이야기하는 모임에 나가고, 몇 달 뒤 퀴어 축제에서 팔 과일주를 만들며 지낸다.
승희씨는 유리가 태어난 이후 장애인 여성으로서 아이를 키우는 것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녀는 결혼 초기 자신이 세 몸을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에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여전히 우울감이 남아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일수씨의 몸, 다리가 불편하고 역시 점점 시신경 위축 중세로 실명이 되고 있는 자신의 몸, 그리고 빠르게 커가는 유리의 몸에 대한 책임이다. 서울시에서 ‘장애인 활동보조’와 장애 여성의 자녀 양육을 도와주는 ‘홈헬퍼’서비스(160가구)를 제공해주긴 하지만, 지금으로선 한 장애인이 두 혜택 모두를 받을 수 없는 형태다. 현재 아이 돌봄 ‘홈헬퍼’ 서비스만 받으며 월 최대 70시간 유리의 육아 도움을 받고 있는 승희씨는 “두 서비스가 통합이 되어 같이 받는 것이 소원”이다.
“제가 유리의 엄마인건 너무 행복해요. 근데 나는 승희이기도 하잖아요?” 하고 묻는 그녀는 요즘 ‘오승희’ 자신을 찾기 위해 애쓴다. 장애 여성 인권을 위한 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과일주를 만드는 과정을 소개하는 인터넷 방송을 하며 구독자와 소통할 때 즐겁다. 그녀는 앞으로 장애여성을 위한 단체를 이끌어가고 싶다. “집 밖에 나가기가 불편해서 안에서 인터넷 방송을 하고 싶다고 해도, 아이가 울어서 못한다든지.. 그런 어려움들을 다른 장애여성들도 여전히 겪고 있어요. 그걸 덜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놀이방을 만들거나 센터에서 서로의 아이를 돌봐줄 수 있겠죠.”
요즘 낙은 인도여행 계획짜는거에요


문애린(38)씨는 여전히 길 위에 있다. 4년 전 활동하던 성북 장애인 자립재활 센터에서 이선희, 김병철 감독을 만났다. 센터에 다니던 동갑내기 진희씨와 함께 <서른 넷, 길 위에서>(제7회 DMZ국제다큐영화제)의 풍경을 내어줬다. 애린씨는 영화에 글 쓰고, 화장하고, 데이트 하고, 자립을 고민하고, 길 위에서 싸우기도 하는 자신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말했다. “그게 우리에요. 우리는 장애인이자 여성이고, 활동가이기도 한데 그 고민들, 단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복합적인 고민들이 치우침 없이 드러났어요.”
촬영 당시 그동안의 투쟁들에 다소 지쳐있던 애린씨는 영화 이후 활동가들의 반응을 통해 회의감을 크게 덜었다. “제주국제장애인인권영화제에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제주 활동가들이 ‘지역에서 활동하는데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른다.’고 하셨어요. 제 이야기가 영상에 담기니 여러 지역에서 보시고 응원이 될 수 있다는 걸 알았죠.” 지금은 주로 광화문 지하 농성장, 전국 단위 연대체인 전국 장애인 차별 철폐 연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가끔 물어요. ‘여전히 길 위에 있으세요?’ 질문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여기 있나 봐요. 이제 <서른여덟, 길 위에서>죠?”
애린씨는 영화를 찍을 무렵부터 부모의 집이나 시설에서가 아닌 자립생활을 유지해오고 있다. 이제 가위에 눌리진 않지만 선잠에 들었다 자주 깬다. 10년 남짓의 활동에 체력도 떨어졌다. 그럼에도 주위의 장애인들이 자신의 설득에 한 명씩 활동에 참여하고, 시민들이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 탈시설[1]에 대해 하나씩 공감하는 것을 보는 힘으로 산다. “그래도 지치죠. 길에서 살아오며 한 번도 여행을 가거나 제대로 쉰 적이 없어요. 곧 같이 일하는 동료와 나만을 위한 인도 여행을 떠날 거예요. 요즘은 인도에서 뭐할까? 상상하며 견뎌요.”
다 해결되면 밀양에서 백수 하지요

남어진(22)씨는 이제 “밀양사람”이다. 2013년 10월, 청도에 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뉴스를 봤다. 경찰들이 밀양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진압하고 있었다. 단박에 달려갔다. 밀양의 흙길 위에 살았다. 다 함께 송전탑 예정부지였던 단장면 용회마을 뒷산에 101번 농성장을 짓고 4개월간 경찰을 기다렸다. 전기도 물도 없었다. 물병을 등에 지고 날랐다. 농성장에 함께 지내던 련 감독이 밥 짓는 연기가 피어나는 <즐거운 나의 집 101>(제7회 DMZ국제다큐영화제)을 기록했다. 촬영 당시의 행정대집행 이후 3년이 흘렀다. 지금 그는 밀양송전탑반대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사무국 활동가다.
행정대집행 3주기인 지난 6월 11일, 그는 ‘밀양 주민들의 4대 요구안’[2]을 들고 어르신들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 섰다. 이 요구안 중에서도 어진씨의 가장 간절한 꿈은 마을 공동체 회복이다. 밀양 송전탑 투쟁 12년 세월동안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주민은 2000가구에서 150가구정도로 줄었다. 그동안 한전에서 “무차별적으로 살포”한 금품이 큰 원인이다. “찬성주민들이 ‘다 끝났는데 왜 너희만 돈 안 받냐’? 하고 반대주민들을 왕따 시켜서 마을 회관에도 못가세요. 송전탑 때문에 마을이 산산조각이 난거죠.” 한전은 마을 공동체 분열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밀양을 떠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그는 송전탑 반대 주민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이며, 탈핵 탈 송전탑 운동의 주인공이었음을 밀양 속에서 또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싶다. 그래야 어르신들의 지난 삶이 더 이상 부정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밀양에 대한 것이 아닌 개인적인 소원을 물었다. “송전탑 관련 일이 모두 잘 해결되어 밀양에서 백수로 지내는 거예요.”
권민기, 오승희, 문애린, 남어진. 이들을 담았던 카메라는 꺼졌지만 이들의 싸움은, 이들을 닮은 이들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울산의 미포조선에서는 비정규직 해고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70일 넘게 고공농성 중이다. 지난 7월 3일에는 ‘광화문 1번가’ 앞에서 장애등급제 폐지 촉구 기자회견이 열렸다. 4일에는 신고리 5,6호기 백지화를 위한 밀양 어르신들의 ‘탈핵탈송전탑 원정대’가 출범했다. 무대의 조명은 꺼졌지만 사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이것이 영화가,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단 하나의 삶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할지라도, 계속해서 찍히는 이유가 아닐까.
[주1] 장애등급제는 장애를 1~6등급으로 분류하고 복지서비스를 차별 지원하는 제도, 부양의무제는 배우자,부모,자녀 등 부양책임이 있는 사람이 일정기준 이상의 소득이 있는 경우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주지 않거나 적게 주는 제도다. 많은 장애인들이 사람에게 등급을 매기는 행위 자체 및 분류 기준의 모호성 등의 문제점을 들어 장애등급제 폐지를, 빈곤 사각지대를 만들고 가난을 대물림한다며 부양의무제 폐지를 촉구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당시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단계적 폐지를 공약한 바 있다. 탈시설 후 자립생활에 대해서 문애린씨는 “여전히 장애인들은 ‘돌봐줘야 할 사람’, ‘비장애인들과는 별개로 살아야할 사람’ 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건 편견이고 우리도 얼마든지 자립할 수 있다.”고 말했다.
[주2] <밀양 주민들의 4대 요구안>
1. 6.11 행정대집행 폭력진압 사과 및 책임자 처벌
2. 한전에 의한 마을공동체 파괴 관련 한전 감사, 책임자 처벌, 공식 사과, 회복 계획 수립
3. 에너지 악법(전원개발촉진법/송주법/전기사업법) 개정
4.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즉각 선언 약속, 노후 핵발전소 즉각 폐쇄 약속, 밀양송전선로 철거 약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