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방의 푸른 꿈> 김대현 감독 GV 기록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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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회 DMZ국제다큐영화제 고양지역 정기상영회 in 백석 메가박스
<다방의 푸른 꿈> 김대현 감독 GV 기록


  • 일시: 08/24(수) 20:00
  • 장소: 백석 메가박스 테이블 M관
  • 진행: DMZ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 박혜미
  • 참석: 김대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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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넷째주 수요일에 진행되는 DMZ국제다큐영화제 고양 정기상영회! 8월 24일 수요일 저녁 8시 백석 메가박스에서 <다방의 푸른 꿈> 상영 후, 김대현 감독님과 함께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였습니다. 그 현장을 지금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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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감독(이하 김): 제가 최근에 참석한 상영회 중에서 오늘 상영회 관객 분들의 연령대가 가장 안정적인 듯합니다ㅎㅎ반갑습니다!

박혜미(이하 박): 먼저, 김시스터즈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어떻게 만들게 되셨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 보셨다시피 김시스터즈는 59년도에 미국에 갔기 때문에 그 당시 국내에서 활동한 적은 없었고, 국내에는 70년대부터 소문을 통해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60년대 생이고 어렸을 때 번한가요를 듣고 자랐고, <다방의 푸른 꿈>을 제작하기 전에 만든 다큐멘터리가 한국 번한가요에 대한 작품이었는데요. 그 때 한국의 번한가요를 알게 되면서 만난 분들보다 앞선 분들이 김시스터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김시스터즈의 어머니가 이난영이고 아버지가 김해송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3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가요의 역사가 존재하는 이러한 재능 있는 가족의 과거와 현재가 궁금해졌고 <다방의 푸른 꿈>을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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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촬영기간이나 전반적인 제작기간은 어떻게 되셨나요?

: 마지막 장면에 보셨던 에드설리번쇼에 나온 이난영과 김시스터즈의 공연이 1963년도에 나왔는데요. 이때가 김시스터즈의 인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였죠. 김해송 선생님께서는 1911년생이시고, 2011년이 탄생 100주년, 이난영 선생님께서는 1916년생이시고, 올해가 100주년입니다. 2011년에 미미시스터즈가 김해송 선생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공연을 열었고, 다큐멘터리는 작년에 완성을 해서 상영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이난영 선생님의 탄생 100주년인데요. 올해 늦어도 가을까지는 많은 관객 분들이 영화를 보실 수 있도록 작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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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시면서 궁금한 점을 질문해주는 분들께는 다음 달에 열리는 DMZ국제다큐영화제 초대권이라는 어마어마한 선물을 증정해드립니다!! ^_^

관객: 세월이 많이 흘러 온 역시인데요. 감독님께서 젊은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신가요?

: 요즘 세대는 각종 유명한 기획사들이 중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죠. 사실, 이난영 선생님은 연애 기획의 원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 남편은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고, 전쟁 통에 먹을 것도 없을 때, 노래도 잘 부르고, 악기까지 잘 다루는 14살, 16살 딸 3명을 데리고 창조적인 기획을 하신 거죠. 김시스터즈는 요즘 아이돌과 다르게 3명 모두 각종 악기를 10개 이상 능수능란하게 다룰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대중가요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관객: 최근에 여러 영화를 봤는데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흥미롭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50대 생이고, 김시스터즈는 제가 자라오면서 많이 들어왔던 분들입니다. 이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번한가요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셨다고 들었는데요. 앞으로 영화를 제작하신다면 함께 작업하고 싶으신 인물이 있다면 어떤 분들이 계신가요?

: 제가 50년-70년대 가요에 대해서 다루다보니 3가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1954년 전쟁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을 당시, 미군이 30만명, 클럽이 280개가 있었는데, 김시스터즈 뿐만 아니라 많은 가수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군인들은 미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노래를 듣고 싶어 했고, 그 당시 가수들은 라디오를 통해 미국에서 유행하는 팝송을 밤새워 연습했습니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다른 산업이 없었던 당시, 30만 명이나 존재하는 미군의 클럽이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컸습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이후로 30만 명이었던 미군이 5만 명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지금으로 치면 연예 기획사 사이공 지구가 엄청나게 생기게 된 거죠. 국가에서 위문공연을 강제로 보낸 부분도 있지만 가수들도 미군을 따라 베트남으로 가서 생존을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김시스터즈는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이 전에 유명해져서 59년도에 미국으로 간 것입니다. 지금의 한국가요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LA나 라스베가스를 가야 보다 많은 자료와 영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싶던 와중에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또 한 명의 인물, 나미를 알게 된 것이죠. 나미는 3살 때부터 레코드에서 나오는 팝송을 따라 부르고 9살 때부터 서울의 미군 부대 무대에 섰고, 14살 가장 어린 나이에 해피돌즈라는 걸밴드를 결성해서 보컬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분들은 미군 부대, 베트남, 라스베가스 등에서 활동을 했고 캐나다의 작은 도시에서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60년대-70년대 한국 가요는 한국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음악을 통해 그 당시 시대상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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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다큐멘터리 영화 너무 잘 봤습니다. 김시스터즈는 어렸을 때부터 이난영 선생님께 직접 교육을 받았는데요. 김시스터즈는 후대 양성을 하지 않았을지 궁금합니다.

: 그 당시에는 본인들도 생존을 하기 위해서 활동을 했던 것이었고, 67년도부터는 김시스터즈도 정점을 찍고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들의 특징은 모든 재능을 가졌지만 오리지널 곡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1960년대 라스베가스에서도 쇼무대 중심으로 활동을 해오셨고, 체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시스템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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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감독님 다큐멘터리 영화 잘 봤습니다만 짧다는 느낌을 받아서 아쉽습니다. 다음 번에는 김시스터즈의 뒷이야기라던가 많은 이야기를 담은 영화를 만들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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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저희 부모님이 목포가 고향이시고, 할아버지가 실제로 목포의 양동에서 사셔서 어렸을 때부터 엄마 아빠가 목포의 눈물을 부르시는 것을 많이 들었지만 그 노래가 이난영, 김해송 선생님들의 곡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같은 시대가 아니지만 영화 잘 봤습니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으로 궁금한 점인데요. 애자씨는 87년 돌아가시고 숙자씨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 세 자매의 이후 행적이 조금 다른 것 중의 하나가 애자와 민자는 아티스트와 결혼을 했고, 숙자씨는 라스베가스에 있는 호텔의 관리를 하시는 분과 결혼을 했습니다. 민자 선생님 부부는 지금 한국에 와계십니다. 월드뮤직페스티벌에 초청되셔서 공연을 했고 내일 모래 홍대 클럽 데이 때 클럽 에반스에서 재즈풍의 목포의 눈물을 연주 하실 예정입니다. 아마 홍대 클럽 데이 역사상 최고 연령이 되지 않을까 생각되는데요.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관객: 제목이 다방의 푸른 꿈인데요. 이 곡은 이난영 선생님께서 부르셨고 영화는 김시스터즈에 대한 이야기인데 왜 제목이 다방의 푸른 꿈인지 궁금합니다.

: 1930년대에 이난영 선생님께서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노래를 부르셨고 그 때는 김시스터즈가 태어나기 전인데, 이난영 선생님께서 김해송 선생님과 10여년밖에 부부로 지내지 못하셨지만 이 노래를 부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죠. ‘다방의 푸른 꿈’은 다방이라는 퇴폐적인 이미지 플러스 푸른 꿈이라는 것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아서 이들의 삶을 관통하는 의미에서 제목을 다방의 푸른 꿈을 제목으로 짓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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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영화 잘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중가요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 식민지 대중가요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그것과 인접해 있는 사람으로서 보충 설명을 드리고 싶네요. 저도 다방의 푸른 꿈이라는 제목을 보고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왜 제목이 다방의 푸른 꿈일까를 생각해보다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근데 막상 아까 질문 하신 것을 생각해보니 다방의 푸른 꿈은 김시스터즈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 왜 제목이 다방의 푸른 꿈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느낀 점은 김시스터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천재적인 작곡가 김해송과 가수 이난영, 환상적인 세기의 스타 같은 결합의 원조, 이 커플이 있었기 때문에 김시스터즈가 탄생했다고 생각을 합니다. 김해송 선생님은 특히 지금 들어봐도 이만한 대중가요의 천재 작곡가가 없을 정도로 일제 강점기에 세련된 음악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다방의 푸른 꿈은 최초의 블루스를 제대로 쓴 창작곡이라는 생각을 하고, 김시스터즈가 이난영 선생님의 딸들이라고는 하지만 목포의 눈물이라는 제목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다방의 푸른 꿈은 김해송 작곡의 이난영 선생님이 노래를 한 것이고 최초의 재즈를 제대로 창작 가요로 만든 것인데 김시스터즈가 미국에 가서 했던 활동을 보면 굉장히 소울풍이고 재즈적인 부분을 잘 살렸기 때문에 그 때 당시 그런 풍을 우리나라에서는 감히 생각하지 못할 것을 다방의 푸른 꿈이 예비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목이 음악적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우리나라 재즈곡을 제대로 부른 이난영, 그 곡을 작곡한 김해송의 자녀들이 미국 무대에서 소울 풍의 미국 본토 음악을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제목을 잘 지었다는 말씀이겠죠?ㅎㅎ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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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이난영 선생님을 잘 몰랐는데요. 개인적인 입장으로 김시스터즈보다는 이난영 선생님의 목포의 눈물이 더 와닿았습니다. 이난영 선생님을 주제로 영화를 만들 계획은 없으신가요?

: 영화를 보시기에 김시스터즈의 공연이 많이 나오는 후반부보다 김해송의 제자 분의 인터뷰가 나오는 부분이 지루하실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제가 굳이 영화적 재미를 포기하면서 그 부분을 넣었던 이유는 30년대에 한국 가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언은 앞으로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해송 선생님에 대해서 그 분처럼 이야기 해주실 분은 더 이상 없을 거라 생각을 하고 역사의 증언이 저에게는 굉장히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30년대를 더 본격적으로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지금은 한 가족의 일대기를 통해서 한국가요의 역사를 담아 본 것이고요. 30년대가 음악적으로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그 시기를 배경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 네 그럼 제가 마지막으로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시스터즈도 연예인이다 보니 오프더레코드로 카메라에 넣지 못한 뒷이야기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요. 한두 가지만 알짜배기로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 질문이 굉장히 예리한데요… 지난 광주 공연을 하면서 제가 다시 카메라를 잡기 시작했고 음악적인 부분보다 인간적인 부분에 대해서 담으려고 하고 있는데요. 이난영, 김해송 선생님의 충격적이 뒷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을 차근차근 모아서 2-3년 뒤에 공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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