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크 현장기록] 늑대부대를 찾아서

2017.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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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부대를 찾아서> TALK 녹취록

  • 일시 : 9월 23일(토) 20:00 <늑대부대를 찾아서> 상영 후
  • 장소 : 메가박스 백석 3관
  • 패널 : 김미례(<늑대부대를 찾아서> 감독), 후지이 다케시(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후지이 다케시 안녕하세요, 후지이 다케시입니다. 오늘 <늑대부대를 찾아서> 이렇게 보러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은 저도 이 영화 편집 작업에 계속 참여를 하고 있어서 여러 번 본 영상인데도 다시 이렇게 보니까, 뭐랄까 말이 잘 안 나오네요. 사실은 여기서 다뤄진 그 사건 자체는 40년 이상 지난 사건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보여준 것은 ‘그 뒤에 흐른 이 40여 년이라는 시간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여기서 이 영화를 본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지금 한국에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하 전선)이라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지, 그런 것들에 대해 오늘 이 시간을 활용해서 다같이 생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김미례 감독과 제가 이렇게 나와서 이야기를 하는 자리이긴 한데요. 근데 사실 이 자리에는 중요한 손님들도 와계십니다. 전선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던 그런 분들 가운데 지금 일본 시민사회 속에서 생활을 하고 계신 분은 딱 두 분이십니다. 이 영화에도 나왔었지만 대지의 엄니에 참여했다가 최근에 석방된 에키타 유키코 씨, 그리고 또 한분은 전갈부대로 싸웠다가 나오신 우가진 히사이치 씨, 이 자리에는 우가진 히사이치 씨가 와계십니다. 한번 일어나 보실까요? (인사와 박수) 그리고 이 전선에 대해 생각할 때, 이 영화에도 많이 나왔었지만, 그들을 계속 지원해온 그야말로 40년 동안이나 그들을 계속 지원해온 사람들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들이 있었기에 전선의 역사는 아직까지도 이야기가 되고 있는 것이고, 만약에 그런 분들이 안 계셨다면 옛날 옛적에 잊혀진 그런 사건이 되었겠죠. 그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대한 사형・중형 공격과 싸우는 지원연락회의에서 활동해오신 히라노 요코 씨 와계십니다. (인사와 박수)

김미례 오하타 씨 같은 경우는, 늑대의 가장 중심인물인 다이도지 마사시 씨가 계시잖아요. 그분이 쿠시로에 고료고등학교라는 데가 있어요. 저분[오하타]이 말씀하시기를 그 학교는 쿠시로에서 가장 하이레벨에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다니는, 그래서 그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홋카이도대학을 가거나 도쿄로 나가서 대학을 가거나, 그런 공부를 잘 하는 사람들이 다니는 데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다이도지 마사시 씨가 다녔고 저분이 다녔고, 물론 후배이시지만, 그래서 쿠시로 촬영을 할 때 저희 코디네이터를 하면서 되게 좋은 장소들을 많이 안내해주셨어요. 오하타 씨라고 하고요. (인사와 박수)

다이도지 마사시의 후배가 되시는 거죠.

네, 그리고 저희 영화의 코디네이터이시고요.

그리고 사실은 오늘 또 한분이, 아라이 마리코라는 분이 이 영화에도 많이 나와 주셨는데, 그분은 사실 전선에 직접 참여를 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이 영화에도 나왔던 것처럼 ‘무형적 방조를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고 오랫동안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는데요. 그분도 사실 오늘 오시려고 했었는데 어머님이 편찮으셔서 오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대신에 메시지를 보내주셨는데요. 일단 그 메시지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영화제에 참석해 여러분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싶었지만 참석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우선 국경을 넘어 40년 이상이 지난 전선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시고 그리고 그것을 영화라는 형태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지금 일본은 아베 정권 하에서 민주주의는 형해화되고 급속도로 과거 배타주의적인 군국주의를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저항하고 일본인과 한국인이 웃으며 손잡을 수 있게 되는 데 이 영화가 힘이 되어주길 기원합니다.”

(박수)

이 자리 자체가 어떻게 보면 역사적인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전선이라는 존재는 제대로 얘기된 적 없었고, 물론 그때 기업폭파를 했던 당시에는 한국 언론에도 보도는 됐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에서 일어난 그냥 폭파사건에 관한 그리고 어떻게 보면 테러리스트들에 관한 보도를 했을 뿐이었지, 그들이 어떤 뜻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왜 그렇게 했는지는 전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40여 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서 이제야 전선이라는 존재가 한국에서도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어떻게 보면 이 영화가 그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래서 일단 이 영화에 대해 여러분도 많이 궁금하신 부분들이 있으시겠지만, 먼저 감독부터 이 영화에 대해 간단하게, 이 영화를 완성시키고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이 영화는 일본 영화잖아요. 무대는 거의 다 일본이고, 대사도 거의 다 일본어입니다. 그래서 되게 힘드셨을 텐데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소감이랄까.

그냥 완성이 됐다는 거에 대해서 아직도 믿기지가 않고 있고요. (웃음) 제가 감당하기 참 어려운 영화였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요, 아직도. 근데 그 와중에 힘들었지만 그 힘든 과정에서 되게 많이 제가 좀 성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 면에서 저한테 이런 고통과 성장을 하게 해 주신 후지이 다케시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웃음) <노가다>라고 하는 작품이 2006년에 있었는데, 가마가사키라는 곳에서 제가 그때 촬영을 했었어요. 뭣 모르고 갔는데 그곳이 두고두고 제 기억에 남았고 그 기억이 자꾸 저를 다시 그곳으로 가게 한 것 같습니다. 근데 그때 2006년 노가다 일본어 자막본을 만들 때 후지이 다케시 씨가 옆에서 감수를 했어요. 엄청 잘난 척을 하면서. (좌중 폭소) 다 자막이 맘에 안 든다, 다시 다 해야 된다, 이러면서 본인이 지원을 했죠. 이렇게 붙여주시면서 딱 던지는 얘기가, ‘근데 김미례가 <노가다>를 만들었으면 그다음에는 전선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해요’라고 했어요. 그래서 무슨 소리야 이게, 이랬는데. ‘이거 되게 중요한데 그분들에 대해서 녹취라도 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지속적으로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그 이야기를 깨우쳐줬어요. 그랬는데 2014년 한국사회가 굉장히 엄혹했던 시기에 정말 그게 딱 땡기더라고요. 가마가사키라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저의 이야기도 그렇고. 그 다음에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과 거기로부터 세상을 바꾸고자 했다는 것, 무장투쟁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교차되는 하나의 지점으로 가마가사키라는 곳을 설정하고 그냥 일단 가보자 했던 거고요. 그래서 저는 그냥 자신감 있게 시작했는데 결국은 중간에 ‘엄청나게 공부할 게 많구나’라든지 [실감했죠.] 어쨌든 이 작업을 하게 된 건 후지이 씨가 약속을 했었죠. 끝까지 함께 하겠다. 만약에 같이 못하면 저도 못한다고 얘기를 했었고요. 약속을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박수)

사실 이 자리에서 어떤 부분에 대해 소개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여러분이 이 영화를 그야말로 어떻게 보셨는지 그게 좀 궁금하고요. 그런 점에서는 저희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얘기하기보다 질문 받고 그렇게 대화를 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시 질문이 있으시면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실은 이해하기가 쉽진 않을 거거든요. 일단 나오는 사람들도 엄청 많고 그 시대상황이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으니까요.


Q1 (1) 당시 전선이 한국에는 어떤 식으로 전해졌었는지 궁금하고, (2) 영화 말미의 삼성디스플레이 베트남공장 장면이 ‘한국 역시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반성 없이 가해자가 된 모습’을 담고 있는 것 같은데 부연설명을 듣고 싶다.

(1) 기본적으로는 사건 자체에 대해 보도하는 것이었지, 주체나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미츠비시중공업 앞에서 폭파사건이 일어났다’ 그런 것은 있었고, 그리고 ‘범인들이 다 잡혔다’ 그런 거 자체는 보도가 됐는데요. 그렇게 자세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기서 보도되는 기조는, 그때 당시 일본에서는 그런 운동들이 많았잖아요. 계속 그런 투쟁들이 많았고. 일본 사회에서는 자꾸 그런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고,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도 조심해야 한다’ 거의 그런 것이었죠. 한국[의 입장]에서 그들이 어떻게 보면 ‘자기편’이라고 해야 하나요? ‘한국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침략과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통감하고 있다]는 식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제대로 전해지지도 못했던 것 같아요. 근데 물론 언론에서는 그랬지만, 다른 차원에서는 그들의 행동이 갖는 의미에 대해 알았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 같긴 합니다. 왜냐면 오늘 이 영화에도 사이토 카즈가 여러 번 한국에 갔던 얘기도 나왔었고, 관계자들이 여러 번 한국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일부 사람들은 그들의 뜻을 알고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요. 근데 그런 것은 한국의 여론이 되기는 당연히 어려웠고, 대부분은 아주 부정적으로 ‘폭탄마 같은 게 일본에도 있다’ 그 정도의 이해였던 것 같습니다.

(1) 제가 국회도서관 같은 데서 한국에는 어떻게 보도됐나 좀 많이 검색을 해봤는데 한 건이 있었어요. 중앙일보에서 보도됐는데, ‘일본 미츠비시에 폭탄을 터뜨렸던 사람들이 문세광하고 연결돼있더라’, 그래서 ‘재일조선인 문세광과 어떻게 연결이 돼 있나’라는 이런 간략한 이야기만 있지 ‘이들이 어떤 의도로 무엇을 했다’ 이런 얘긴 전혀 없었고요. 굉장히 사악한 사람들로, 위험한 걸로, ‘문세광과 연결돼있는 거 같다’는 정도의 표현이었던 거 같아요. 74년도였기 때문에 한국사회가 엄혹했던 시대였잖아요. 그 시기에,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이토 카즈 씨가 68, 69, 72년 그렇게 걸쳐서 계속 한국에 왔다 갔는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하지만. 사실 저희가 맨 처음에 그 콘셉트로 영화를 기획했었거든요. ‘이 사람들이 도대체 한국에 와서 누굴 만났을까.’ 그 사람들을 찾아서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이야기해보자 했었는데, 사이토 카즈 관련해서 사람들한테 얘기 좀 들으려고 했다가 엄청나게 혼났어요. 왜냐면 ‘그거 건드리고 다니면 일본사회의 많은 사람들한테 폐를 끼치는 거다’, ‘위험하다 왜 건드리냐’, ‘건드리지 말라’고 말도 못 꺼내게 하고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눈물이 쏙 나려고 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건, 이게 통일혁명당 쪽과 관련이 돼 있었고 일본 내에 통혁당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체포와 함께 (저의 짐작으로는) 그것이 수면 아래로 확 가라앉았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죽음으로 그걸 다 덮었는데 그걸 제가 지금 와서 혹시 아시냐고 얘기를 하고 다니니까 엄중하게 절 혼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알겠다고 그러고서 거기까지 했던 기억이 나고요. (2) 마지막을 어떻게 끝내느냐를 놓고 한참 고민했는데, 후지이씨의 생각이 저 ‘늑대의 꿈을 좇아서’라는 걸로 절대 끝내면 안 된다, 무덤에서 끝나선 안 된다, 죽음으로 끝내선 안 된다, 많은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저한테 저걸[영화 말미에 삽입된 동영상] 확 던지더라고요. 던진 게 많이 있었지만 자막 없이 설명 없이 아는 사람만 알 수 있도록 그냥 [이걸로] 가자, 그래서 불친절한 것들이 많이 있었을 거예요.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저희가 의도를 했다고 생각하시면 될 거 같고요. 저는 저게 일본 이야기지만 사실은 일본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고 국가 이런 저런 걸 넘어서 우리 현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고 작업을 했어요. 언어는 일본어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현재의 모습이다’, ‘우리의 과제다’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했습니다.

Q2 1974년이면 일제강점기가 끝난 시점으로부터 30여 년 후다. 이 사건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다.

중요한 질문을 해주셨는데요. 그것은 ‘전후 일본’이란 무엇이었는가와 관련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중요한 것이 ‘일본이 패전 직후 과거 제국주의의 역사를 청산하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필요를 못 느끼고 있었다’라는 게 아주 큰 거 같아요. 그래서 전후 민주주의라는 게 미국의 점령을 거쳐서 만들어졌다는 식으로 얘기가 되지만, 그때 일본 사람들 대부분이 생각하고 있는 자기의 위치는 ‘피해자’, 자기들은 ‘군국주의의 피해자였고 괜히 전쟁에 말려들어서 고생을 했다’, 그래서 ‘다시는 전쟁 같은 걸 하지 말자’ 라는 방식이었죠. 사실은 식민지배나 침략에 대해서는 반성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런 것이 전후 30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왔다고 할 수 있는데요. 그 계기가 된 것은, 늑대부대의 중심인물이었던 다이도지 마사시도 전공투 활동을 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죠. 그러니까 1968, 69년 이때쯤에 일본 대학에서는 전공투 투쟁이라는 것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때 그들이 내세웠던 것 중 하나가 ‘자기부정’이라는 것이었어요. 근데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대학에서 운동을 하고 있으니까 ‘특권자로서의 대학생인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대학생이라는 위치뿐만이 아니라 과연 일본 제국주의, ‘일본에서 이렇게 태평스럽게 대학을 다닐 수 있는 나는 무엇인가’, ‘나는 이렇게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베트남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게 무엇일까’ 라는 것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보면 자기부정의 논리라는 것은 당연히 대학생이라든가 그런 수준에 머무를 수가 없는 것이었고. 그렇다면 ‘지금 일본에서 이렇게 살고 있는 나의 위치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래서 그 역사를 파헤치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렇게 하다보니까 바로 한국인들을 강제 연행했던 역사라든가 그런 것들, 이미 어느 정도는 한일협정을 전후로 해서 일본 내부에서도 얘기가 많이 나오게 됐었고. ‘그러한 역사적인 위치에 있는 나 자신을 어떻게 부정할까’, 그러한 것을 단순히 과거의 문제로 보지 않고 현재의 문제로, 과거 일본이 잘못했다는 수준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도 잘못하고 있고 그것은 과거의 잘못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이런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이었죠. 자기부정의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의 과거 제국주의의 역사,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인 제국주의의 역사를 직시하게 되었고. ‘그렇다면 실제 이 침략이라는 것을 추상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투쟁을] 조직해보자’라는 생각을 한 거죠. 예를 들어서 그때 당시는 그야말로 베트남 반전운동이라는 것이 아주 광범위하게 벌어지고 있었는데, 근데 ‘우리가 단순히 베트남의 평화를 얘기하면 되는 거냐’, 오히려 어떻게 보면 ‘베트남전과 비슷한 상황을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렇게까지 생각을 한 거죠. 그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자기 생활을 걸고 싸우고 있는 거잖아요, 제국주의와. 그렇다면 ‘막연하게 평화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제국주의를 파괴해야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것이 국가권력 일반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업들, 실제로 과거 일제의 침략과 함께 성장했던 그런 기업들이 여전히 전후 일본에서도 주요기업으로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 역사를 끝내는 것, 그것을 우리는 먼저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이었죠.

Q3 (1) 재일조선인들과의 연대나 조우가 있었는지, 그리고 (2) 일본 영화계에서 적군파와 연관시켜 재현된 적 있는지 궁금하다.

(1) 실제로 전선과 재일조선인들과 관계는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조선혁명사연구회라는 모임이 있었는데, 거기에 재일조선인들도 주로는 가르치는 역할로 많이 참여를 했었고 나중에 전선을 만들게 되는 사람들이 거기서 같이 그런 역사도 공부하고, 그런 자리는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직적인 관계는 없었죠. 어떤 특정 민족단체와 손을 잡고 했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고, 그것은 다른 신좌파 단체들과 관계를 전혀 안 가졌던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영화로는 본격적으로 이걸 소재로 다룬 경우는 없었죠. 찾아봤는데 없었고요. 방송은 좀 봤었어요. 타이틀이, NHK에서 만든 건데, ‘테러, 그 후 40년’인가 이런 제목으로 아주 굉장히 다이내믹하게 굉장히 공포스럽게 시작해서 결국에는 일본 경찰이, 공안이 승리하는 걸로 끝나는 그런 게 하나 있었고요.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이것도 NHK였던 거 같아요. 최근에 2, 3년 전인가, 헨미 요 시인하고 다이도지 마사시 씨가 감옥에서 같이 시를 주고받는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있었는데요. 나중에 보니까 약간 서정적인 것 비슷한 측면이 좀 있긴 했지만, 저한테는 감옥에 있는 다이도지 마사시라는 사람이 시로써 자신의 고통을 쓰고 있다는 걸로 읽혔는데, 그때 변호사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게 방영되는 동안 NHK에 빗발치게 항의전화가 들어왔다더라고요. 어떻게 살인자를 저런 식으로 ‘어머니가 나보다 먼저 돌아가시고’, ‘가슴이 아프다’ 이런 얘기를 어떻게 할 수 있게 만드냐, 그걸 어떻게 방송에 흘려보내느냐, 이러면서 항의전화가 되게 빗발쳤다고 얘길 하더라고요. 일본 사회의 또 다른 하나의 무서운 측면을 본 것 같았고요. 그 정도로 재현된 걸 봤습니다.

Q4 다큐를 보면서 투쟁에 참여했던 분들을 잊지 않고 끈질기게 지키고 지지했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지지활동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뒤에 히라노 씨가 와계신데요. 그분이 그 상황을 제일 잘 말씀해주실 것 같은데, 제가 여기서 [영화에 히라노 씨를] 많이 안 넣은 건, 지원은 하되 일본사회가 워낙 이지메가 심하니까 이걸 드러내고 했을 때…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빼달라고 하는 분들이 되게 많았고요. 영상에 드러나는 것도 되게 조심스러웠고 대놓고 얘기하시는 건 저 정도 분들이었고요. 그게 참 어려운 부분이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제가 정리했어야 됐었는데… [지원연락회의 분들이] 다양하게 곳곳에 계신다고 했잖아요. 근데 제가 만약 가면은 정말 군말 없이 원하는 걸 해주고 돌아가세요, 바로. 그래서 저도 얘기를 듣기가 어렵고, 그분들이 ‘행동으로 마음으로 이런 것들을 하고 있구나’ 하는 걸 알았고. 공통되는 건 딱 하나였던 것 같아요. 그 사람들이 문제제기했던 부분, 침략전쟁과 전쟁책임의 문제, 천황의 책임, 기업의 책임에 대해서 굉장히 공감들은 하고 있었다.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삶의 터전에서 자신의 입장에서 행동을 하고 계신다. 이 정도만 간파를 했고, 그걸 어떻게 담아내야 하는가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지만… ‘늑대들로 가야되겠어요’ 라고, 그게 하나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건 바로 우리 자신의 현재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고요. 아까 얘기했듯이 우리 내부의 반성과 우리도 우리가 무슨 짓을 했는가를 들여다봐야하는 시기, 지금이라도 시작을 해야 하지 않는가 생각을 했는데… 가능할까 모르겠네? (웃음)

영화 안에서도 전선을 지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특별하다고 이야기가 나왔었는데요. 대부분 이런 정치집단에 대한 탄압이 있은 다음에 생기는 지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들의 운동 노선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게 대부분이었죠. 근데 전선의 경우는, 실제로 지원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폭파투쟁이라든가 그런 거 긍정하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들의 그 방식은 잘못됐고, ‘그렇지만 그들이 던진 문제에 나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라는 데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래서 끈질기게 할 수 있었던 것이죠. 만약 그것이 노선에 대한 지지였다면 그렇게 오래 할 수가 없죠. 여기 「지원연락회의 뉴스」라고 최신호가 있는데요. 이게 405호거든요. 36년 동안 계속 이걸 내왔던 거예요. (좌중 박수)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지원연락회의 분들은] 그들[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몸소 제기하려했던 그 문제 자체를 받아들인 것이죠. 그들의 방침이라든가, 노선이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역사를 받아들이려고 할 때, 뭐랄까 그런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Q5 일본에서 오신 손님들께서 영화를 보시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듣고 싶다.

저도 되게 듣고 싶었는데 질문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히라노 씨, 혹시 한 말씀 해주실 수 있나요?

히라노 사실은 지원을 했었지만 [제게 있어서는] 지원이라기보다, 당사자와 굉장히 가까운 입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볼 수는 없었던 게 사실인데요. 이 영화를 보고나서 든 생각은 한마디로 ‘정말로 한국 분이 이렇게 영화를 제작해주셨다니!’였습니다.

사실은 이런 자리가 너무 특별한 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그런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야말로 오랫동안 신뢰관계가 쌓여서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부분들. 전선 [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지금 일본사회에서 철저하게 고립되어있고, 정말 이 지원연락회의 실제로 몇 분 안 되거든요. 실제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몇 안 되는 사람들이 40년 동안이나 지원해왔다는 것인데요. 어떻게 보면 그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언론에서 평가를 해주진 않고 전혀 다뤄지는 일 자체가 없었죠.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것이었는데, 사실은 이런 자리에서도 쉽게 발언을 들을 수 없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저도 얘기 듣기 되게 힘들었어요. 아직도 많은 얘길 못 듣고 있습니다. 행동으로 조용히 보여주시니까.

Q6 일본 역사를 잘 모르고 전선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당시 일본 내 운동 흐름 속에서 전선의 위치(가령 적군파와 전선의 관계 등)와 그 조직구성이 궁금하다.

일단 조직적으로는 일본 적군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적군파 같은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당 건설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런 점에서는 전위로서의 자기들의 활동이라는 것을 설정했었죠. 그래서 무장투쟁 같은 걸 하기도 했었는데, 적군파가 그렇게 싸운 것은 직접적으로 일본의 침략의 역사를 끝낸다든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혁명을 위한 것이었죠. 중요한 것은 전선은 일본혁명이라든가 그런 걸 아예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침략의 역사, 이걸 끝낸다.’ 그게 목적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당’이 아니라 ‘전선’을 만든 것이었고, 또 어떻게 보면 조직체도 아니었어요. 그야말로 몇 명만 하는 그런 모임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쉽게 잡히지 않았던 거죠. 그러니까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전공투라는 거 자체가 조직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였던 것처럼, 그들은 조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자는 그런 방향이었던 것이죠. 그런 점에서는 적군파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히라노 아까 지원자로서 감상이 어떤지 조금 얘기했었는데 부연설명을 해드리면, 김미례 감독님이 2년에 걸쳐 일본에 여러 번 방문해주셨고, 아까 감독님도 말씀하셨지만 취재 자체가 많이 힘들고 곤란한 상황이 많았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을 찾아주셔서 이렇게까지 취재를 많이 해주신 것, 영화를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정말로 너무나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한국을 침략해서 많은 분들의 생명을 빼앗았고, 그 외 많은 것을 빼앗고 차별도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전혀 변화가 없으면서 오히려 더 심해져 가는 것 아닌가 싶은데요. 이렇게 일본의 입장에서 지금도 그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저희가, 일본인이 먼저 영화를 만들어서 상영하고 앞으로 사회를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감독님이 오셔서 후지이 씨의 협력과 많은 분들의 지원을 받아서 영화를 만들어주셨고요. 아까 아라이 마리코 씨의 메시지도 있었지만, 정말로 이 행동 자체, 영화 자체가 너무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영화를 보고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박수)

김미례 기쁘네요. 칭찬을 잘 안하시는 분인데. 절 혼내기만 하시는데. (웃음)

Q7 연합적군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는 앞선 답변의 맥락에서, (1) 가마가사키 지역 노동계급 운동을 하다 보니 한중일을 초월한 계급운동의 역사 같은 것에 천착해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활동을 하게 된 건지, (2) 20세기 초 한중일 ‘동북아평화운동’ 등의 활동과 어떤 이념적 공유지점이 있는지, 그리고 (3) 전갈부대에서 생존하신 분이 나중에 PFLP(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나 아랍혁명운동 활동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전선의 이후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다.

(3)(1) 전선으로서 일단 체포됐다가 일본 적군에 의해 구출된 분들이 몇 분 계셨죠. 그런 사람들은 실제로 아랍에 가서 적군이 되는데요. 근데 그건 그때 비로소 생긴 관계였다고 볼 수 있죠. 그러니까 일본 적군 입장에서도 실제로 이렇게 싸우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자기들의 동지로 삼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고. 근데 실제로 그때 일본 적군에서 요구는 했지만 안 나간 사람들도 여러 명 있어요. 전선뿐만 아니라 다른 걸로 잡혔던 사람들도 석방을 요구하기도 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부했고 어떤 사람들은 아랍에 가서 싸우겠다 생각해서 나간 경우도 있었던 것이죠. 이 영화에서 에키타 유키코 씨 같은 경우에도 가서 실제로, 병참 그쪽을 하고 싶다 생각했다고 얘기했었잖아요. 그전에는 직접적으로 폭파를 하거나 말하자면 ‘파괴’를 하는 운동을 해왔는데, ‘뭔가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얘기가 나왔었지만. 그래서 일본 적군에 들어갔다고 해도 무장투쟁 일반과는 약간 다른 층위의 생각이 좀 있었던 거 같아요.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는 사실 알 수가 없어요. 어떤 활동을 했었는지. 본인도 자세히는 얘기를 아직까지는 안 하고 있고. 어쨌거나 원래 노선 자체는 분명히 다른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특히 전갈부대 같은 경우에는 하층노동자 투쟁에 기반을 두고서 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런 점에서 늑대라든가 대지의 엄니 같은 경우 약간 흐름이 달라요. 오히려 그들에게는 한국이라든가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했고, 일본 제국주의의 역사를 끊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게 무엇보다 강했지만, 그래서 어떻게 보면 그야말로 자기부정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었죠. 그래서 어떤 사람한테 ‘그건 심정적 윤리주의다’라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어요. 자기가 일본제국주의 본국임을 어떻게 부정할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을 위한 무장투쟁으로 되어있다, 그런 비판도 있었고. 근데 전갈부대 같은 경우는 이미 하층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느 정도 고양되고 있었고. 근데 싸우다보면 한계에 부딪히게 되잖아요. ‘그렇다면 그것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무장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서 그들은 싸웠으니까요. 근데 어쨌거나 그러면서도 당 건설이라든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진 않았던 것이고, 아무래도 노선적으로는 많이 다른 부분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2) [20세기 초 ‘동북아평화’ 이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 같진 않고요. 안중근이라든가 그런 사람들을 의식하고는 있었죠. 처음에 부대 이름 어떻게 할까 할 때 ‘의병’이라든가 그런 얘기도 나왔었거든요. ‘그런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이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있었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일단 직접적인 연결을 보기는 조금 어려울 거 같습니다. 왜냐면 기본적으로는 ‘역사의 연속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었고, 일단은 전선이라는 그 이름 자체도 자기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미 그때 동아시아 각지에서 반일 투쟁, 반일 운동, 특히 태국이나 그런 데서 대규모로 벌어졌었고. 그래서 이미 전개되고 있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우리도 참여한다’는 입장이었어요. 그런 점에서는 ‘지금 현재 동아시아’에 문제의식이 가장 강하게 있는 것이고, 과거 역사 속에서 자기들의 기원을 찾는다든가 그런 부분은 그리 강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제가 느꼈던 거는, 아직도 이게 진행 중인 사건이다, 과거가 아니라 정말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이기 때문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거예요. 여기 우가진 씨도 그렇고. 사실은 도망 중에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들이 많이 있고 현재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묵혀야 되는 것들. 그 다음에 제가 쿠시로에 갔을 때 다이도지 마사시의 아내였던 다이도지 아야코에 대한 이야기도 되게 많이 들었지만, 이분은 아직도 잡히지 않은 상태로 일본 적군이 되어서 지금 어딘가에서 뭔가를 하고 계실 텐데,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정말 언급하고 싶은 분이었지만, 여기서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있고. 아직도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거, 그런 와중에 저분[다이도지 마사시]이 돌아가신 거고, 아직도 사형수로 도쿄구치소에 계신 분이 있고요. 참 무모했다고 생각하는 게, 사형수 접견이 안 되는 줄도 몰랐고요. 그냥 가서 편지라도 주고받으면 되겠지 했는데 일체 그런 것들도 안 되는 거였고, 만날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는 그리고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에 말할 수도 없는 이런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이 있더라고요.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서 나중에야 감을 잡았고요. ‘아, 말을 할 수가 없구나, 지금은.’ 에키타 유키코 씨가 나왔을 때도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에키타 유키코 씨가 모든 매스컴을 거절했어요. 그 도쿄구치소 앞에서 4대 방송국이 계속 인터뷰 요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니네들이 나를 테러리스트로 이용할 거 아니냐’ 라고 하면서 전혀 믿지 않았고 모든 걸 거부했지만, 저와 아다치 마사오 감독님 두 사람에게만 ‘동지니까’ 하시면서 카메라를 허락해주셨어요. 그래서 이게 더 진행이 가능했던 거 같고. 그런 상황에서 무슨 얘기라도 듣고 싶었지만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이것이 언론을 타고 나왔을 때 굉장히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그냥 보여주는 것 외에 ‘이 사람이 지금 무슨 말을 했다, 감상이 어떻다’ 이런 얘기를 전혀 할 수가 없더라고요. 뒷감당도 하기 힘들 것 같고, 본인도 일단은 굉장히 조심하고. 그래서 일본 적군에 참여해서 무슨 활동을 하고 뭘 했는지에 대해서 아직도 언급이 안 되고 있고요. 아직 다 진행 중인 사건이기 때문에 안개 속처럼 모호하게 둘 수밖에 없었던, 그 흔적들만 봐야했던 그런 부분이 있어서 관객 여러분들이 [느끼기에] 굉장히 분명하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분명하게 설명해줘야 하잖아요. 방송처럼 막 설명해줘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정보가 부족하고 그래서 어렵겠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어려운 영화 봐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박수)

Q8 이 영화가 이 시점에 한국에 도착했다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이 든다. 후지이 선생의 권유로 시작된 영화라고 하셨는데 권유한 이유를 알고 싶다.

전선이라는 존재 자체가 저한테는 너무나 큰 존재였어요. 물론 알게 된 건 대학 가고 나서였지만, 저도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라고 그러면서도 지금 이렇게 한국사를 공부하기도 하고 그런데요. 근데 결국에는 저도 자기부정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근데 그런 것을 그야말로 제가 태어나고 몇 년 지난 그 시점에서 미츠비시중공업 폭파사건 등이 있었던 건데요. 그니까 저도 존재하긴 했었죠, 그때도. 그런 것들이 저한테 던진 질문이라는 것은 너무나 큰 것이었고, ‘그렇다면 나는 거기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어떻게 보면 끊임없이 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와보니까, 물론 일본에서도 전선을 알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이긴 하지만 한국에서는 전혀 모르잖아요. 희한하게도 적군파는 다 아는데. 근데 전선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게 대부분, 아니 절대다수였죠.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을까’라는 걸 옛날부터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김미례 감독이 <노가다>를 찍었고, 그 영화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의 어떤 투쟁 양상이라든가 그런 걸 전하려고 했었고, 근데 그런 걸 보면서 ‘이런 문제의식이라면 사실은 전선의 존재에 대해서 한국에서도 다큐라는 방식으로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 것이었죠. 그래서 열심히 꼬셨고. (웃음) 근데 아무래도 어려웠어요, 처음에는. 꼬신 지는 정말 오래됐거든요. 근데 아무래도, 일본에 가서 한번 취재를 하긴 해봤는데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고 일단 접었었거든요. 그래서 그 뒤에 작품 몇 개를 하셨어요. 그런데 그럴 때, 아까 본인도 말씀하셨지만, ‘이제 이거 좀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셔서 저도 본격적으로 [참여했죠.] 근데 사실은 만드는 과정에서 정말 많이 도와드리질 못했어요. 마지막 편집을 할 때야 열심히 참여했지만, 일본 갈 때마다 원래대로라면 제가 같이 가서 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 시간을 내질 못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많은 아쉬움이 남습니다. 근데 어쨌거나 저로서는 옛날부터 하고 싶었던 거 하나를 한 셈이긴 한데요. 물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계기로 해서 전선 같은 존재에 대해 한국에서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그런 자리를 많이 만들었으면 좋겠고요. 근데 정말 ‘40년 전 사건’은 아니거든요. 아직까지도 일본 적군으로 아랍에서 활동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고, 전갈부대의 키리시마라는 사람은 아직까지 한 번도 안 잡혔어요. 어딘가에 있는 거거든요, 그 사람은. 그런 사람들이 아직까지 자기들의 이웃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문제제기 자체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그 문제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이런 대화의 자리를 어떻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지’ 그런 고민을 좀 더 같이 해보고 싶습니다.

그럼 시간이 되었으니 마무리하겠습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대해 관심 가져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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