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고라: 대항-이미지로서의 다큐멘터리
김용진 홍보마케팅팀
집회의 이미지테이킹
“영화는, 청중들을 만나기 위해 도시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대중에 대한 움직이는 이미지를 묘사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서 청중은 그들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반영, 즉 영화를 통한 확인은 우연히 모인군중(즉자적 군중, the mass-in-itself)을 자의식적이고 목적추구적인 군중(대자적 군중, the mass-for-itself)으로 변형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할 수 있다.” (수잔 벅 모스, 윤일성 옮김, 『꿈의 세계와 파국 : 대중 유토피아의 소멸』,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p.175)
미디어의 왕좌에서 영화가 내려온 이후, 그곳의 점유권을 주창하고 있는 것은 이론의 여지없이 뉴스영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인용구에서 영화를 지우고 대신 뉴스를 기입해봐도 좋을 것이다. 2016년 10월부터 2017년 4월까지 약 1700만 명의 집회군중을 불러 모았던 촛불집회의 이미지는 뉴스영상을 통해 전국각지에 전파되었고, 이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할 수 있던 이들이 ‘대자적 군중’이 되어 거리로 나선 것이다. 이때 놀라울 정도로 한국의 방송사들은 동일한 이미지를 전파에 실어 보냈다. 기존의 친정부적 뉴스들까지도 촛불시민들의 평화적인 집회 방식을 성찬하는 과정에서, 특정 이미지들이 대량으로 유통되었다. 그것은 집회군중 사이에서 자기검열이 이루어지는 장면이었다. 그 이미지 안에서 버스에 올라타는 시민과, 전경과 몸싸움을 하는 참가자를 제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다른 시민들이었다. 이러한 평화적 시민성, 정치적 운동에 참여하는 과단성 등이 집회 군중의 완벽한 이미지를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집회는 그야말로 전례없는 수준의 인파를 한 곳에 모았다. 이는 정권을 전복시키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기 다른 집회가 있다. 2011년 월가를 점령한 월스트리트 오큐파이 운동은 특기할만한 대조사례가 된다. 미국의 리버럴들에게 ‘극우선전기관’이라고 불리는 폭스TV는 그 곳에 모인 ‘괴짜’들을 충실히 기록했다. 모든 집회가 그렇듯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단 하나의 목적으로 모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미국정부가 외계인을 납치했다며 그들의 해방을 보장하라고 목청껏 외쳤으며, 혹자는 미국의 한 군부대가 엄청난 양의 금괴를 지하에 숨겨놓고 있다며 정부의 부덕을 질타하였다. 폭스가 취한 이 이미지들은 뉴스 전파를 타고 미국 곳곳에 확산되었다. 그 목적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집회를 난파시켜 고립된 섬에 가둬두려는 것이었다. 앞서 열거한 ‘괴짜’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이 점령운동의 직접적인 슬로건과는 조금 다른, 소수자 운동들이 약동했다. 이들 역시 거대 금융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방송들의 먹이가 되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주는 교훈은 이것이다. ‘집회에서의 이미지테이킹은 집회의 결과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정체성 정치에 대한 혐오, 혹은 의제의 위계화
그러나 성공사례로 제시된 한국의 광장도 사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공중파와 케이블 뉴스들은 이 특기할만한 시민불복종 운동에서 스펙터클을 생산하기 위해 군중의 부감쇼트를 찍어 전파에 실어 보냈다. 이 얼굴이 소멸된 군중은 단 하나의 이미지를 상정한다. 그것은 박근혜 퇴진만을 지상목표로 내세운 단 하나의 군중이다. 이러한 언론의 이미지테이킹 전략은 민주화 이후 엘리트들의 뿌리 깊은 어떤 태도와 연결되는데, 그것은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계이다. 정체성 정치는 다문화주의의 기반이 되는 하나의 정치 양태로, 시민 개개의 정체성을 중시하는 정치를 말한다. 오랜 기간 문화전쟁의 전장이었던 미국의 경우, 지식인들의 정체성 정치에 대한 경계는 매우 뚜렷하다. 미국 사회학자 토드 기틀린(Todd Gitlin)은 미국의 정체성 정치가 진정한 사회문제에는 침묵한다며, “민주주의는 차이를 축하하기 위한 면허 이상의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바꿔 말해, 정체성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은 의제의 위계화를 주장한다. 빈곤문제보다는 안보문제가, 소수자 문제보다는 빈곤문제가, 환경문제보다는 소수자문제가 중요하다는 식이다. 물론, 정체성이 소거되고 총화된 하나의 군중은 집회의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집회의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이 거대한 에너지는 급격히 추동력을 잃고 공중에서 해체된다. 1987년 6월에서 우리는 같은 기억을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항-이미지로서의 다큐멘터리 <광장>, <모든 날의 촛불>
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 이론가인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는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이미지를 분할하거나 대립되는 두 개의 이미지를 나란히 병치해 비판적으로 조우하는 이미지의 순간을 포착한다. 이것은 대항-이미지(Counter-Image)라고 불리는데, 그는 대항-이미지를 우리 시각의 최전선에 융기시킴으로써 코드화된 이미지들을 해체하고 조작된 이미지가 주는 통일된 세계관을 저격한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론은 TV뉴스가 담아왔던 촛불광장의 이미지에 적지 않은 부분을 시사한다. TV뉴스의 군중부감쇼트는 1700만 명의 개별 발화자를 단일 발화자로서 기록해왔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정권퇴진이라는 목표가 촛불군중들의 최종 도착지라는 착각을 야기한다. 그 일단의 목적이 달성된 지금, 광장의 불씨는 소화될 심대한 위협에 처해있다. TV뉴스의 군중 이미지와 비판적으로 대치할 대항-이미지가 요구되는 순간인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촛불군중을 해체하고 그들의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주는 이미지다.

올해 특별전인 ‘특별기획: 광장이여, 노래하라’의 영화 <광장>(Candle in the Wave, 2017)은 촛불광장을 담은 10편의 영화를 모은 옴니버스 영화로, 현재 요구되는 광장의 대항-이미지로 부각한다.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카메라들이 고층 건물 위, 방송국 차량 위 등에서 내려와 군중의 정수리와 카메라의 플래시 라이트가 같은 고도가 될 때, 비로소 군중들은 그 얼굴을 되찾는 것이다. <광장>은 폐쇄회로 속에서 촛불집회의 성과를 성찬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TV속 촛불군중 이미지들이 의도적으로 누락했던 각양각색의 정체성들을 스크린에 불러낸다. 그것은 광장 연단에 선 집회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소중하게 기록하는 <광장에 서다>로 시작되어 공장식 축산에 목소리를 높이는 시위군중의 모습(<광장의 닭>)이거나 새로운 선거 이전에 다급한 목소리로 18세 참정권을 요구하는 청소년 군중들의 모습(<천 개의 바람이 되어>)이기도 하고, 광장에서 여성혐오에 대한 저항적 제스처를 취하는 페미니스트들의 모습(<시국페미>), 사드를 반대하는 성주시민(<파란나비>)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다큐멘터리들은 지각의 ‘공시적 확장’뿐만 아니라, 촛불집회 이후의 그들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지각의 ‘통시적 확장’을 꾀하기도 한다. 광장의 승리 이후에도 여전히 같은 삶을 살아가는 청소노동자들의 모습을 광장과 노동자들의 교차편집을 통해 보여주거나(<청소>), 87년 승리를 좌절시켰던 노태우의 당선과 박근혜 탄핵 축하 연설 장면을 병치시킴으로써 광장 이후에 대해 근심하는 <함성들> 등이 그런 사례다. 특별기획의 또 다른 옴니버스 영화인 <모든 날의 촛불>(ALL day candles, 2017)역시 광장을 둘러싼 지각의 공시적·통시적 확장을 보여주는데 <광장@사람들>은 촛불집회를 이끌었던 활동가들의 소회를 통해 집회군중들의 면면에 숨결을 불어넣고, <광장에서> 역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마지막으로 <일상의 촛불>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혹은 참여하고 싶었던 사람들을 찾아가 광장 이후의 삶을 다시 끌어다 놓는다.

광장 이미지의 전쟁터에서
질주학(Dromologie)을 주창했던 폴 비릴리오(Paul Virilio)는 제1세계의 정치체를 ‘민주정’이 아닌 ‘질주정’으로 규정하면서 속도의 생산과 진보가 정치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천착하였다. 그의 ‘질주정 혁명’의 첨병인 현대의 디지털 미디어는 군사기술이 발명해낸 ‘광학적 원거리 지각’이 매체화한 것으로, 이전에는 없었던 원격현전을 전례없는 속도로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그 총아인 TV(TV뉴스)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영화를 압도하는 속도로 총화된 광장 군중의 이미지를 공고화시킬 것이다. 그렇다. 이제 남은 것은 광장이 아니다. 앞으로 끊임없이 마주칠 것은 촛불광장의 이미지이며, 거기에서 촉발되어 뇌 속에서 상연되는 다시, 광장의 이미지이다. 광장이란 ‘공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은 소멸되었고, 장소에 고정된 인간도 없다. 광장에 나선 시민들도 없다. 그 행진도 없으며, 함성도 없다. 오직 그것을 기록한 무수한 비디오그램들만이 남을 뿐이며, 그것은 이제 디지털 전자신호로 변하여 ‘속도’에 몸을 맡기게 된다. 광장 이미지의 속도전쟁.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진정한 적은 제작여건도, 권력의 아집도 아닌 속도인 것이다. 그리고 DMZ국제다큐영화제는 그 속도전쟁 속에서 다큐멘터리스트들의 날개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