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결산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입말의 역사’ – DMZ Docs 시니어 프로젝트 <영상으로 쓰는 생애이야기> 현장 스케치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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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결산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입말의 역사’
– DMZ Docs 시니어 프로젝트 <영상으로 쓰는 생애이야기> 현장 스케치

김용진 홍보마케팅팀

 

 

 

 

시인의 언어로 기록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시대가 도래하면서 활자가 과거의 특권적 지위를 내려놓았듯, 언젠가 입말(목소리)도 글말(활자)에 의해 가녘으로 후퇴했다. 역사의 기록 방식도 같은 변화를 겪었다. 최초의 역사는 두 말 할 것 없이 ‘구전(Oral Tradition)’이었다. 그러나 입말에서 글말로, 글말에서 영상으로의 이행과정이 무작정 전진은 아니었다. 영상이 제공하는 생생한 현전은 외려 기록에 대한 의심을 막았다. 거슬러 올라가면 글말 역시 입말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갔다. 장 자크 루소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시론’에서 이렇게 쓴다. “참다운 말은 글말이라기보다 입말이었다.” 루소는 글말과 입말을 대응시켰다. 이성 대 정념, 정확성 대 표현성, 개념 대 감정. 언어의 기원이 정념을 표현하는 데서 시작했고, 최초의 말이 시인의 언어였다고 보는 루소에게 참다운 말은 단연 ‘입말’이었다. 입말에는 글말에는 없는 감정이 있다.

이제 참다운 말이 다시 불리우는 것일까? 구전의 역사가 끝난 지금, 오직 엘리트와 사가의 이성으로만 짜인 역사가 인간을 소외시킨다고들 한다. 학자의 정제된 언어가 아닌 정념의 말과 시인의 언어로 쓰이는 삶과 문화가 대항 역사로 부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입말이 지위를 되찾는 데에는 영상이 일조했다. 영상은 입말의 치명적인 약점, 기록불가능성을 보완해주었던 것이다. 이제 기록된 ‘구술사’가 공신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구술사는 아래로부터의 역사 기술을 가능하게 했고, 개인적 기억으로부터 공적 역사의 형상을 떠오르게 했으며, 그림자들의 함성을 위한 확성기가 되었다. 구술 다큐멘터리는 활자의 고고함과 경직성에 항변하며 자연스레 떠올랐다.

 

영상으로 쓰는 생애 이야기, 주름의 전사(前事)를 기록하기

올해 DMZ국제다큐영화제는 시니어들을 위한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그런 입말의 힘을 떠올렸다. 시니어들의 입으로 직접 듣는 그들의 역사를 구술사의 방식으로 기록해보고자 한 것이다. 지난 6월 27일부터 시작된 프로젝트에 모인 60대부터 9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니어 수강생들은 카메라 앞에서의 집단 면담을 통해 지난 삶을 복기해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자신의 삶을 결산하고, 이마와 손의 마디마디 쌓인 주름에 주석을 달았다. 영화제는 이를 통해 시니어들이 지나간 삶이 준 상처를 치유하고 성찰하여 더 건강한 노후의 청사진을 그리는데 일조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입말을 통해 서서히 그 형상을 드러내는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있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니 장기지속의 역사니 하는 엘리트의 시선과는 다른 개인과 감정의 역사였다. 편한 자세로 자기 얘기를 풀어내는 이 자리에 맴도는 묘한 엄숙함은 여기서 나오는 것이었을 터였다.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 5인의 역사

조용서(90, 남)씨는 평양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와 북쪽의 공산치하를 겪고 1.4 후퇴때 월남을 해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유독 모래와 인연이 깊었다. 첫 직장을 십수년 다닌 후 한강이 보이는 모래 터에 집을 지었지만, 보름만에 일어난 홍수가 모두 쓸어갔다. 마치 모래성처럼 쌓아온 것들이 무너졌다. 훗날 만난 점쟁이가 그에게 말했다. “손에 모래를 쥔쥔 듯한 삶이다” 그 말대로였다. 무엇을 가졌다가도 모래처럼 손에서 빠져나갔다. 재기한 그가 48세가 되었던 70년대에는 중동붐이 일었다. 조용서씨는 사우디아라비아로 건너가 일하며 무슬림이 됐고 세례명도 받았다. 무하마드 오스만. 모래의 땅에서 성실히 일했던 그에게 70년대는 낭만의 시절이다. 수많은 당대의 젊은이들이 이국의 땅으로 건너가 노동자로서 일했다. 취업난과 세대갈등이 극에 달한 요즘, 그는 당시가 종종 그립다. “젊은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서 일자리를 못 잡고 있는데, 과거 선배의 삶을 참고해 저런 삶을 고려해보았으면 좋겠다”고 청년들에게 제언하기도 했다. 기시감이 들지도 모른다. 과거 한 정치인이 청년들의 중동행을 독려했다가 사정 모르는 소리라며 여론의 뭇매를 맞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모래의 약한 지반에서 삶을 끊임없이 재건해왔던 용서씨의 말은 한 정치인의 말처럼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각인된 세월은 이성의 언어로 쉽게 풍화되지도 않고 말이다.

장재용(76, 남)씨 역시 겪어온 세월이 만드는 간극을 몸소 경험하고 있다고 한다. 재용씨는 최근 소위 ‘태극기 집회’에 나갔고, 이로 인해 자식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는 1941년에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의 집은 대가족이었다. 3대가 함께 살았다. 부농의 자식이었던 그는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조부모와 형님과 누이를 잃었다. 상실의 고통에 어머니는 한때 제정신이 아니었다. 3.15부정선거때 모인 시위대의 인파에 그도 있었다. 그의 옆 여학생이 공권력의 총에 맞아 눈 앞에서 숨졌다. 살기 위해 달렸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정권이 들어섰는데 시원찮았다.” 결국 군부가 준동했다. 반공과 전체주의가 민주정의 대변자들을 먹이 삼던 시절. 그러나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자본이 자본의 등을 타고 부풀던 시대였으니 수요공급의 쌍곡선에서 이는 상승기류에 올라탄 사람들도 많았다. 전역후 사업을 실패한 재용씨도 그 기회를 잡았다. 부동산 투자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럼에도 재용씨가 진정 재기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덕이다. “내가 인생을 다시 살 수 있게 한 원동력은 아내였어요. 아내가 없었다면 나는 재기하여 제2의 인생을 살 수 없었을 겁니다.”

 

 

아내에 대한 재용씨의 말이 끝나자. 자연스레 규방의 삶이 화두가 되었다. 한상연(66, 여)씨는 회한이 많았다. 아내의, 며느리의, 어머니의 삶이 상연씨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연시켰다. 결혼후 엄혹한 시집살이를 했다. “내 계급은 식모보다 아래였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집을 나온 상연씨는 집도 절도 없어 고생도 많이 했다. 그러던 중 주식에 눈을 떴다. 지수가 380을 돌파하던 시절이었다. “부잣집에서 자라 경제관념이 없는 남편” 대신 상연씨가 재산을 불렸다. 혼자 벌어 자식들을 사립학교에 보냈으며, 박사에 석사에 힘껏 가르쳤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공부를 했고 기회를 올라탔다. 성공한 아내, 성공한 어머니. 그럼에도 상연씨는 공허하다. 결혼후 시어머니와의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남았고, 가모장으로써 치열하게 살았지만 자신을 위해 한 것이 없다고 느낀다. 상연씨는 다시 다짐한다. “남은 인생은 나를 사랑하면서 살기로.”

그렇게 백안시되었던 여성의 삶. 해방 후 최초의 문민정부에 이르기까지 길지도 않은 시간, 몇 번의 파국과 재건을 반복하는 사이에 여성의 역사는 쉬이 누락되었다. 조명녀(78, 여)씨는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시절, 징병을 피해 바다 건너 중국으로 가족을 데리고 이주했다. 그러나 도피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말처럼, 중국 역시 척박한 곳이었다. 중국 사평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해방을 기다렸던 가족은 매일밤 찾아오는 마적단에 숨 죽여야 했다. 순사 대신 마적이었다. 당시 다섯 살이었던 조명녀씨는 두 여동생과 키우던 개를 그 곳에서 잃었다. 이 등쌀, 저 등쌀. 왜정에서, 마적으로. 마적에서, 인민군으로. 해방을 맞이하고는 명녀씨가 집안의 장녀로서 가정의 살림을 책임졌다. 삯바느질을 하다 미용사 자격증을 땄다. 사실 명녀씨는 공부가 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여성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은 어머니가 되는 거였다. 그러나 애가 들어서질 않았다. 명녀씨는 집을 나와야 했다. 자식 딸린 남자와 재혼을 했다. 힘든 시절이었다. 남편이 죽고 자식들은 집을 나갔다. 이후 십 년을 혼자 살았다. 이후 첫 남편과 25년만에 해후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좋은 기억으로 끝나진 않았다.

 

 

여성으로서 넘어야 할 파고가 삶의 이정표가 되어준 경우도 있었다. 김영(76, 여)씨는 목회자다. 양반집에서 태어난 그에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꿈에도 안 될 일이었지만, 언제나 삶은 예기치 못하게 흘러간다. 남편은 보스톤 한인교회의 목사였다. 김영씨는 속절없이 목사의 ‘사모님’이 됐다. 그는 매일 기도했다 “하느님, 저를 ‘침묵’하는 동물이 아닌 ‘말’하는 도구로 써주십시오.” 결국 미국에서 신학학위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국에 있던 양반집 친정 오라버니는 물었다. “미국에서 목사면 양반이냐?” 김영씨는 양반보다 자유가 좋았다고 회고한다. 이후 남편이 서울의 교회에 부름을 받아 귀국했고 김영씨는 미연합감리교회로부터 모국선교사로 파송됐다. 이때 그는 고국의 여성의 삶에 눈을 돌리게 된다. 한국의 보수교단은 여성들에게 목사안수를 거부했다. 구로공단 여성노동자의 삶에 희망이란 신기루같은 것이었으며, ‘기지촌 여성’들은 거친 이국의 남자들의 폭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1989년. 그는 한 여성교회의 창립목사가 됐다. 여성교회는 앞서 열거한 현실들을 바꾸는 신앙의 실천이요, 요체로 자리 잡았다.

이상 ‘영상으로 쓰는 생애 이야기’에 참여한 5인의 이야기였다. 얼마전까지 진행한 집단면담에서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한, 곧 제작될 다큐멘터리의 프리뷰(Preview)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와 전쟁 전후의 생존투쟁, 독재와 압축성장, 여성의 고난한 삶 등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키워드가 5인을 관류하고 있었다. 이제 평균 나이 77세의 시니어들은 곧 집단면담을 마치고 촬영, 편집 등의 실무 교육을 거친다. 각자의 역사를 질료로 삼아 스스로 만들 다큐멘터리 영화는 11월에 공개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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