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이미테이션 : 아시아를 넘어 동시대의 환경을 바라보는 첨예한 시선
김신 시민에디터
“아시아의 시선으로 아시아를 담아낸 아시아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한다.”
며칠전 마침내 막을 내린 DMZ국제다큐영화제의 아시아 경쟁 섹션을 소개하는 문단의 첫 번째 문구다. 섹션의 화두를 소개하는 이 문장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아시아 경쟁 섹션에 초대된 9편의 장단편 다큐멘터리들은 아시아의 각기각지에서 초대된 다양한 작품들로 채워져있었다. 한국에 인접한 중국과 일본뿐 아니라 네팔, 대만, 미얀마, 인도, 필리핀등 미디어를 통해 여과된 거시적인 사실관계만 전해들을 수 있었던 많은 지역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다는 점. 게다가 섹션내 모든 상영작들이 월드 프리미어, 혹은 한국 프리미어 상영 작품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섹션으로부터 우리가 알아갈 수 있는 풍성한 이야깃거리와 얼굴들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바쁜 일정탓으로 많은 작품들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섹션중 유독 한 작품이 기억에 남았다. 27일날 진행된 시상식 결과, 그 아홉 편의 작품중에서도 인정을 받아 아시아의 시선상을 수상한 주 첸(Zhou Chen) 감독의 <라이프 이미테이션>(Life imitation, 2017)이다. 시상 결과로 작품성을 판별하는 것이야말로 다큐멘터리의 성정을 가늠하는데 있어 가장 지양해야할 태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는 몇 가지 생각을 이어나가게 만든다. 우선, 아홉 편의 상영작중 <라이프 이미테이션>이야말로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라는 점을 외면할 수 없다. 아시아 경쟁 섹션에 초대된 여타의 상영작들은 모두(내가 보지 못한 작품들 또한 프로그램 노트에 기입된 내용을 통해 추정해 봤을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제 3세계 국가들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다. <라이프 이미테이션>은 반대의 길을 택한다. 애초부터 게임 화면, 모바일 메신저 화면, 현실의 세 가지 화면을 어지럽게 뒤섞는 이 작품에서 분명한 지역성을 발견해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끔 가다가 얼굴을 내비치는 인물들이 발설하는 말들, 그리고 감독의 국적을 통해 영화가 중국의 상하이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어림짐작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영화 내부에서 요긴한 컨텍스트로 작동하지도 않는 것 같다. 의미심장한 사실은 지역성뿐만 아니라 서사와 인물 또한 영화 내부에서 지워져있다는 사실이다. <라이프 이미테이션>에는 무수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할 뿐 아니라 대부분의 이들이 기존의 젠더 체계로 포섭되지 않는 다양한 성적 지향을 가지고 있다. 일견 감상적인 드라마를 산출해내기 무엇보다 용이한 질료앞에서 감독이 선택한 결단은 의아스럽다. 개별 인물마다 10분 남짓한 러닝타임도 할당하지 않을 뿐더러 이들이 가끔씩 토로하는 격한 감정에도 분명한 동기와 원인을 지워 놓았기 때문이다. 캐릭터 스터디와 인터뷰 연출 또한 멀끔하게 제거한 상태로 진주하는 영화앞에서 다큐멘터리에 대한 통념적 지식은 뻥뚫린 구멍에 던져대는 돌멩이처럼 무용하기 짝이 없다.
<라이프 이미테이션>의 부재하는 인물의 자리를 대체한 것은 캐릭터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난데없이 등장하는 게임 화면에는 한 여성 게임 캐릭터가 나와 셀카를 찍는다. 그 셀카를 찍는 행위 이후에 화면은 다시 현실로 전환되어 어느 순간 어떤 여인의 핸드폰에 촬영된 셀카의 이미지로 변해있다. 관객들은 앞서 제시된 게임 화면속 여인과 추후에 사진 어플에서 보이는 인물간의 외적 유사성을 포착할 수 있지만 둘은 분명한 인과를 형성하지 않은 채 제각각 부유한다. 되돌아보면 <라이프 이미테이션>은 이러한 연출들로 가득하다. 현실과 가상 화면은 앞서 말한 것처럼 외형적 유사성을 공유하며 매치 컷으로 연결되기도 하며, 화면에서 들려오는 유사한 음성들을 통해서도 서로 중첩되거나 대체된다. 물론 일관된 이야기가 없는 영화속에서 이런 연출들을 이야기 내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차라리 우회로를 택하는 편이 유용할 것 같다.
어쩌면 다음과 같은 견해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즈마 히로키는 2007년에 저술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당대 일본 소설 환경이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서 “게임적 리얼리즘”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한다. 가상이 실재를 대체한 포스트모던의 시대, 작품의 서사와 언제라도 작별하여 메타 이야기적인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캐릭터 문학이 순수문학의 단일성을 위협하는 시대에 더 이상 작품속 인물은 독립적인 정체성으로 통합되지 않는 무수한 층위로 분기하기 시작한다. 물론 가상과 실재가 거리낌없이 몸을 뒤섞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문화적 환경이 이런 현상을 가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히로키는 곧 변화하는 리얼리즘의 틀을 통해 라이트 노벨을 위시한 새로운 문학의 경향을 해석할 것을 권유한다. 그를 통해 관변적인 시각으로 평가하자면 그저 무의미하고 가벼운 대중문화의 산출물에 불과해보이는 이런 문학작품들로부터 우리는 인공환경으로 변화하는 문화적 국면을 반영하는 컨텍스트를 새롭게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환경 분석적 독해”라 정식화한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에서 히로키는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에 기반한 소설의 전회에 주목하고 있지만, 저서에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대로 이것을 소설의 문제로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 화면에 투영된 이미지와 실제 대상의 존재론적 상동성을 담보하는 사진적 존재론에 기반한 영화의 시대는 퇴조했다. 대상과 이미지의 투명한 결속이 끊어지고, 가상현실로 주재되는 스펙타클이 시네마를 점령한 시대에 사진적 투명성은 무력화된다. 관객들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영웅적 캐릭터들, 혹은 스크린위의 어떤 물질에도 <아바타>(Avatar, 2009)의 주인공 제이크가 쉽사리 아바타에 동기화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동일시하지만 구체적인 고민을 생략하고 가상으로 도약한 화면은 어딘가 기만적일 뿐이며, 현실에서 일탈한다는 미명하에 자행되었던 동기화의 시도들은 극장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흩어져버릴 허구적 공상으로 전락해버렸다. 그 결과, “관조된 대상을 (…) 넋 놓고 바라보면 볼수록 삶의 영역은 축소되며, 이러한 지배 이미지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할수록 무엇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이고 욕망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스펙타클의 사회』, 기 드보르) 물론 가상과 실재라는 관념의 경계 자체가 모호화된 시대에 섣부른 비관론을 전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치 이런 패러다임의 전회에 대한 메타적 논평을 감행하려고라도 하듯, <라이프 이미테이션>은 “환경 분석적 독해”의 욕망을 자극하는 장면으로 가득하다.
여기에서 앞서 언급한 셀프 카메라 장면을 다시금 복기해볼 수 있다. 캐릭터가 셀카를 찍던 게임 화면에서 전환된 화면은 현실속에서 방금 막 셀카를 찍은 한 여인의 얼굴을 전환된다고 말했지만 이 묘사는 충분하지 않다. 보다 정확히 말해서 우리는 여인의 실제 얼굴이 아니라 사진 어플을 통해 지속적으로 조정되고 변형되는 가상의 이미지를 보게된다. 게다가 이 인물이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몇 분간 등장하자마자 별 말도 없이 곧바로 사라진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지닌 인간인지 가늠할 도리가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 주첸 감독은 마치 그 여인을 누구나 동기화할 수 있고 변형이 가미될 수 있는 유사 게임 캐릭터로 읽으라고 권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슷한 방식으로 읽힐 수 있는 연출들도 있다. 앞서 <라이프 이미테이션>속 여러 종류의 화면이 무작위로 뒤섞인다 말한 바 있지만 이 말에도 수정을 가미할 수 있을 것 같다. 현실에서 게임으로 화면이 전환되기 직전, 인물들은 의미심장하게도 “내 정신이 아니고 싶을 때 술을 마시지.”, “모두 앞에서 나는 연기를 해”와 같은 뉘앙스의 대사들을 지속적으로 발설한다. 이런 대사들 이후에야 화면이 전환된다는 사실은 영화가 지속적으로 어떤 분열과 괴리의 징후를 육화하려한다는 인상을 제공한다. 기존의 젠더체계에 분명하게 고정되지 않는 성정체성과 관련한 문제들, 심리적 소요사태에 직면하는 인물들, 그로 인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타자와 대면하려하나 기어코 실패하고야 마는 인물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인물들.(자신의 정체성을 조작하려는 욕망이 게임속 캐릭터에 접속하거나 프로필 사진을 조작하는 일련의 행위로 발현되었다고 읽을 수 있을 터이다.) 감독인 주첸은 시도때도없이 틈입해오는 메신저 화면과 가상 현실 화면을 위와 같은 인물들의 서사와 병치시킴으로써 역설적으로 누구라도 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그 누구도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효과적으로 인지시킨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고백을 풀어놓자면 <라이프 이미테이션>은 사진적 존재론에 기반한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의 걸작 <엘리펀트>(Elephant, 2003)와의 혈연관계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콜럼바인 고교의 총기난사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엘리펀트>와 <라이프 이미테이션>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엘리펀트>의 중간에 게임 화면이 잠시 등장한다는 사실도 흥미롭지만, 결정적으로 두 영화의 후반부에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특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구스 반 산트는 영화가 총기난사사건이라는 마지막 비극에 도착하기까지의 거의 모든 인과관계와 인물 묘사를 소거하고 잉여의 장면들과 월광 소나타의 구슬픈 멜로디를 새겨넣었다. 이것이 바로 실화를 다룰 때 있어 사건과 인물과의 거리를 필사적으로 유지하고자한 그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잉여의 장면들중 가장 잦은 빈도로 나타나는 장면은 인물들이 걸어가는 장면을 거리를 유지한 채 찍은 트래블링 숏들이다. 마찬가지로 <라이프 이미테이션>또한 마지막 장면에서 게임 캐릭터에 의해 총기난사가 자행되기까지 뚜렷한 인과관계가 제시되지 않으며, 그중 가장 많이 출몰하는 잉여의 장면은 게임 캐릭터들과 인물들이 거리를 걸어가는 장면들이다. ‘걷기 시작하거나’, 혹은 ‘걸어서 어딘가에 도착하는’ 장면이 아니라 오로지 ‘걸어가는 행위’만 담아냈다는 사실. 이 연출은 우리가 타자의 행위에 분명한 원인과 결과를 설정할 수 없듯이, 우리가 여전히 주체의 동일성으로 설명되지않고 남아있는 타자의 형상을 예술을 통해 응시해야 한다는 간접화된 영화적 성명으로 읽힌다. 다만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가 1인칭 시점을 통해 주체와 타자를 분리시키는 카메라를 통해 타자의 형상을 주형했다면, 사진적 존재론이 시효를 다한 시대에 영화를 제작한 주 첸은 살인사건을 게임 캐릭터에 의해 자행시켜버림으로써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는지조차 모호하게 만들어버린다. 어쩌면 게임을 통해 인터랙티브한 지위를 점유한 21세기의 관객들이 타자의 육체와 형상에 이물감없이 동기화하는 시대속에서도, 주 첸은 “내 삶을 살고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교술한 루이지 피란델로의 말처럼, 타자와 마찬가지로 불가해하게 남아있는 주체의 분열을 응시하기 위해 분투하는 예술가일까. 면대면으로 주 첸 감독의 의중을 들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프 이미테이션>은 명백하게 <엘리펀트>에 바친 오마주, 혹은 <엘리펀트>의 게임적 번안이라 생각되는 작품이다. 결국 <라이프 이미테이션>은 “아시아의 시선”을 넘어 동시대의 환경을 바라보는 첨예한 시선을 제공하는 작품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