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여성 노동자, 존재 회복의 여정
- 일시 : 2017.09.24.(일)
- 장소 : 메가박스 파주 3관
- 강연자 : 은유(작가), 배경내(청소년 노동인권네트워크 활동가)
- 정리 : 신효진 (시민에디터)

경험해보지 않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자신의 세계관과 충돌하는 이야기를 공감할 때 비로소 인식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 제9회 DMZ국제다큐영화제를 위해 작가 은유가 선정한 세편의 영화 <나의 교실>(Dear My Friends, 2011), <외박>(Wea Bak: Stayed Out Over Night?, 2009)>, <시 읽는 시간>(Time to Read Poems , 2016)은 분명 다수의 사람들이 겪는 이야기는 아니다. 여자상업고등학교 취업기, 마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파업, “가난과 해고와 실직과 배제에 떠밀려온” 이들의 이야기. 얼핏 교집합이 없을 것 같은 세편의 다큐멘터리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이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엮은 은유는 다음과 같이 외치는 듯하다. “과연 저 다큐들 속 인물들이 우리네 삶과 다르다고 확신할 수 있어? 결국 세상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는데…….”
지난 9월 24일(일) 메가박스 파주출판도시에서는 다큐초이스 섹션의 큐레이터 은유와 ‘인권교육센터 들’의 활동가 배경내의 강연이 있었다. 언제나 세상의 낮은 곳을 유심히 살폈던 그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
성실·근면의 가치 이면에는
영화 <나의 교실> 속 나오는 특성화고의 교훈은 ‘성실’과 ‘근면’이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가치는 한국인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가치기준이지만 은유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의 척도는 조금 다르다. 성실·근면에 대한 강요는 세상의 부조리에 참으라는 의미가 숨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 속 나오는 여상 3학년 취업반 아이들에게 회사와 학교란 이치에 맞지 않아도 버텨내야만 하는 공간이다. 선생님은 학생들의 취업률이 떨어지면 다음해 학교 예산이 삭감되기에, 원치 않는 일터로 학생들을 내몬다. 회사는 일반노동자들이 꺼리는 일에 학생들을 투입하고 열악하기 그지없는 근무환경을 강요한다. 격무에 시달리던 학생들은 버티지 못하고 ‘소환’되고, 학교는 아무렇지 않게 학생들에게 말한다. ‘학생들이 참을성이 없다고. 근면 성실하지 못하다고’ 노동에 대한 감수성이 현격하게 떨어진 이 사회에서 자신의 고통을 뱉는 것에 용기를 내야하는 현실에 은유는 안타까워했다.
더욱 문제인 것은 특성화고 학생의 취업정책이 우리사회 주요 사회의제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교육부에서는 인문계 중심의 대입 교육정책만을 내고 있고, 일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설계는 미비하다. 그렇다고 노동부에서 이들을 책임져주지도 않는다. 하여 이들은 오늘도 학생과 노동자의 사이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또한 은유는 청소년 노동자가 겪는 직장 내 차별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여상 졸업 이후 5년간 직장을 다녔던 그녀는 자신이 취업했을 때 대비해서 비정규직, 부의 양극화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사회적 약자들이 발 디딜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오빠는 남자니까 대학에 가야한다”
2017년 한국의 유리천장 지수는 5년 연속 OECD에서 맨 끝을 달리고 있다. 또한 대졸 여성의 시간당 임금은 남성의 70.9% 수준이다. (다른 분야도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한국 노동시장에서 성차별의 정도는 참담한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나의 교실> 속 가정형편이 어려워 진학이 어려운 ‘누리’는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오빠는 남자니까 대학에 가야한다. 자신이 돈을 벌어서 오빠의 학비까지 낼 수 있다. 그래야 집안이 잘 살 수 있다” 1970년도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가 지나고 십여 년이 지난 이후에도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여성의 지위와 역할이 가족의 돌봄과 가사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었지만 누리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은 아직까지 여성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은유는 현실적 여건으로 인해 공부에 대한 욕망이 후순위로 밀려나는 청소녀 노동자들이 존중받을 수 있는 세상을 기다린다.
여자는 키가 커도 안 되고, 작아도 안 된다?
유리천장에 임금 차별. 여성 노동자의 삶은 팍팍하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들은 외모와 꾸밈까지 강요받고 있다. <나의 교실> 속 주인공 누리를 향해 선생님은 “너무 쎄보인다”는 외모품평을 서슴지 않는다. 노동시장에 던져진 큰 키를 가진 여성은 건방져보인다는 이유로 굽이 낮은 신발을 신고, 작은 키의 여성은 면접에서 왜 키가 작은지 추궁 당한다. 여성은 공손해야한다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노동시장에서 조차 다양한 방식으로 주입당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차가 크겠지만)자본주의사회에서 꾸미는 행위는 소비를 야기하고 이는 가뜩이나 기울어져있는 임금 격차를 크게 만들 것이다.
<외박>에서 등장했던 대형마트의 여성노동자에게도 일터는 녹록치 않은 곳이다. 가사 노동은 물론이거니와 임금 노동까지, 기혼 여성들의 하루는 고단하기만 하다. 그리고 삶을 지켜나가기 위해 힘겹게 살아나가는 이들의 노동은 존중받지 못한다. <외박> 속 파업한 그녀들은 이러한 노동사회의 견고한 틀을 깨기 위해 투쟁한다. 그들의 ‘외박’은 노동의 권리를 찾는 과정이자 여성을 차별하는 장벽을 부수는 행위기기도 하다. 영화 속 ‘외박’을 하는 그녀들은 이제 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남성 중심 사회를 향한 그녀들의 외침이 세상을 바꿀 수 있기를. 시대의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