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현 (다큐멘터리 감독)
DMZ국제다큐영화제와 관련이 있는 ‘외부인’에게 영화제 글을 받고 싶다는 청탁을 받았다. 덜컥 수락은 했지만 고민이 되었다. DMZ국제다큐영화제가 어떤 영화제였는지, 또 지금은 어느 자리에서 서 있는 영화제인지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가 어려웠다. 결국 영화제가 다큐멘터리 감독인 ‘나에게’ 어떤 장소였는지를 회고하면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2009년, 제작했던 영화 <할매꽃>이 개봉되고 다음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화와 삶에 대한 고민에 젖어있던 때이기도 하다. 다큐멘터리가 무엇일까, 나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자발적으로 하고 있을까,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걸까. 그때 DMZ에 다큐멘터리영화제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다. 직후 영화제에서 ‘평화’와 관련된 옴니버스 영화를 지원하기로 했는데 함께 할 수 있겠는지 물어왔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한 감독들의 면면을 보니 호기심이 동했다. 다양한 국제영화제에서 이름을 알린 일본의 소다 카즈히로, 싱가폴의 탄핀핀, 인도의 슈프리요 센이라 했다. 우리가 말할 평화가 어떤 언어로 그려질지 궁금해졌고, 능력은 안 되지만 해보겠다는 답변을 주었다. 1년의 제작기간이 지나 <용산>이라는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른 참여 감독들의 영화를 통해 다양함을 배웠고, 우리는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화 안에서 나는, 우리는 잘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는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지를 이야기했다.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다큐멘터리 제작에 큰 매력을 느낀 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과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된 제 1, 2회 DMZ국제다큐영화제에서, 이전까지 상상 못했던 많은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되었다. 영화제가 열렸던 파주 출판단지는 나에게 아지트와 같았고(교통편이 없어서 일정 시간 이후 나갈 수가 없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영화와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모두 잘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살아갈 지 이야기했다. 지지향 호텔(영화제 숙소) 옆에 새벽부터 올라오는 물안개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는 한참동안 잊지 못한 풍경이었다. 세계적으로 회자되었던 많은 외국 작품들, 다양한 특별전과 기획전에서 봤던 영화들은 선,후배 제작자들과의 술자리 안주가 되었다. 이 과정 중에 다큐영화의 힘을 알게 되었고 더불어 삶의 지식들을 얻었다. 이외에도 소박한 기억의 편린들이 있다. 초청된 외국 감독들과의 어색함 때문에 따로 몰래 모여 놀았던 기억, 좀처럼 먹어본 적 없는 아침밥이 있었던 곳, TV가 없는 호텔방에서 훔쳐왔던, 그리고 내 영화에 너무나 큰 영향을 주었던 ‘짐 자무쉬 인터뷰집’(다음 해에 원 위치 해 놨습니다), 그리고 독립PD분들처럼 다양한 영역과의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한편으론 걱정도 일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재정의 DMZ국제다큐영화제로 인해, 독립영화감독들이 일구어온 인디다큐페스티벌이 위축되지는 않을까, 인디영화판의 가치가 유명무실해지지는 않을까. 두 영화제가 윈윈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논쟁하고 토론했다. 확실했던 건 영화제를 이끌었던 많은 스태프들과 관계자들의 열린 마음이었고 영화제의 성격, 지향점, 혹은 철학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손을 잡고 뭔가 만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제는 제작자들 뿐 아니라 일반 관객들에게도 입소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영화를 전혀 모르는 지인들이 나에게 DMZ국제다큐영화제를 추천하기도 했다.

이후 매해 영화제를 방문하게 되었다. 더불어 DMZ영화제가 기획한 많은 일들을 함께 하기도 했다. 경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청소년다큐제작이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많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다큐제작을 하고 있는 친구들은 물론, 동종업종에서 열심히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친구들과의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찾아갔던 다큐교실과 영화제 청소년 심사위원단과의 논쟁, 제작지원 및 국내경쟁 심사를 통해 만났던 심사위원들과의 토론 등은 나를 풍부하게 해 주었다.
독립PD분들과 독립영화인들이 1년간 함께 했던 시간도 기억이 난다. 정기 상영회를 통해 서로의 영화들을 보고 제작과정이나 배급에 대해 심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같은 해 영화제 안에서 포럼으로 그 결과들을 공유했다. 외연이 확장되는 경험이었고 내가 지금 어느 위치에서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 지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기억이다. 고인이 된 이성규 감독님의 삶에 대한 열정과 영화에 대한 사랑은 평생 잊지 못할 의미가 되었다.
다큐멘터리 제작 전 과정을 세계적인 언어로 배울 수 있었던 ‘Crossing Borders’, 생경했던 영화배급을 인지할 수 있었던 ‘Asian Side of the Doc’ 역시 DMZ영화제의 네트워킹으로 가능했던 경험이었다. 처음엔 어색하기만 했던 아시아 많은 감독들과는 서로의 근황을 묻는 관계가 되었고 함께 했던 다양한 포럼과 워크샵 등은 나의 영화적 체질을 확인하는, 더불어 한국 다큐멘터리영화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어떤 영화제가 자리를 잡기위해서는 5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들 이야기 했다. DMZ국제다큐영화제의 규모는 커지고 인지도 역시 크게 달라졌다. 하지만 5년이라는 시간동안 영화제 안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 같다. 먼저 정들었던 파주를 떠나 백석과 파주에서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내부 스태프들이 바뀌었지만 초창기만큼의 영화제에 대한 애정을 감지하기는 쉽지 않다. 지친것일까? 역시 영화제 내실의 문제일 것이라 생각해본다. 내 영화를 꼭 상영하고 싶은 영화제, 지역으로부터 환영받는 영화제, 학계, 문화계, 언론계, 영화판의 지지를 받는 영화제가 되기 위해서는 이 시점에서의 DMZ국제다큐영화제만의 지향과 철학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신진/기성감독들에 대한 사전제작지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제 상금에 대한 이야기만도, 국내/아시아 제작자들과의 네트워킹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내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써의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영화제 정신 혹은 정서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를 위해 당연히도 영화제 스태프들의 활동환경에 대한 개선이 필요할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스태프들이 제작자들, 관객들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영화제를 꾸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체계적인 시스템과 더불어 DMZ국제다큐영화제만이 가질 수 있는 인문학적인 상상력, 사회과학적인 치열함도 기대해본다. 세계 3대 다큐멘터리영화제의 하나라 불리는 일본의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의 일관된 아카데믹함과 그 진지함이 예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DMZ국제다큐영화제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 혹은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영화제가 그 장을 활짝 열어두고 끊임없이 소통하고 논쟁하고 실험해보기를 기대해 본다. 함께 만들어가는 영화제, 진중하고 고민하는 뚝심 있는 영화제를 기대해본다. 영화제의 전통과 역사는 아마도 이 지점에서 시작되지 않을까. 그래서 DMZ국제다큐영화제는 계속 가야 한다.
DMZ국제다큐영화제는 현재까지 일반 관객들 뿐 아니라 제작자들에게 큰 역할을 해 왔다. 만약 다큐멘터리영화가 세상을 보는 창이라 할 수 있다면, 나는 <평화, 소통, 생명>의 가치를 가진 이 영화제를 통해 나와 내 주위를 돌아보고 성찰했던 수없이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성취들은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변화된 모습과, 영화제를 애정 하는 많은 제작자들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해온 거 같다. 영화제에 고맙다. 한해 한해 기다려지는 영화제, 기대하며 가고 싶은 영화제가 되기를 희망해본다. 우리 모두가 함께 어울려 놀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격 없는 영화제가 되기를 바란다. 나와 우리가 배워야 할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느끼는 영화제가 되기를 바란다. 청소년부터 80대 노감독의 이야기까지 즐길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영화제,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풀어 놓고 함께 연대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영화제, 다름의 풍부함을 삶의 언어로 배울 수 있는 영화제, 주류질서의 전복을 이야기할 수 있는 혁명적인 영화제가 되기를 바란다. 한국에도 이런 영화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행복하게 자랑할 수 있는 시간도 기대해본다. 이를 위해 정체하거나 머무르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기를 분열시키고 가진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해체할 수 있는 도발적 상상력과 이에 따르는 실천도 기대해본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영화제로 항상 옆에 있어주기를 바란다.